* 이곳에 살기 위하여 - 정희성
한밤에 일어나
얼음을 끈다
누구는 소용이 없는 일이라지만
보라, 얼음 밑에서 어떻게
물고기가 숨쉬고 있는가
나는 물고기가 눈을 감을 줄 모르는 것이 무섭다
증오에 대해서
나도 알 만큼은 안다
이곳에 살기 위해
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에서
싸우다 죽은 나의 친구는 왜 눈을 감지 못하는가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봄이 오기 전에 나는
얼음을 꺼야 한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나는 자유를 위해
증오할 것을 증오한다 *
* 숲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
* 민지의 꽃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
* 동년일행(同年一行)
괴로웠던 사나이
순수하다 못해 순진하다고 할 밖에 없던
남주는 세상을 뜨고
서울 공기가 숨쉬기 답답하다고
안산으로 나가 살던 김명수는
더 깊이 들어가 채전이나 가꾼다는데
훌쩍 떠나
어디 가 절마당이라도 쓸고 싶은 나는
멀리는 못 가고
베란다에 나가 담배나 피운다 *
* 청도를 지나며
문상할 일이 있어 밀양 가는 길
기차가 마악 청도를 지나면서
창밖으로 펼쳐지는 감나무숲
잘 익은 감들이 노을젖어 한결 곱고
감나무 숲 속에는 몇 채의 집
집 안에 사람이 있는지
불빛이 흐릿한데, 스쳐 지나는
아아, 저 따뜻한 불빛 속에도 그늘이 있어
울 밖에 조등(弔燈)을 내다 걸었네 *
* 아가(雅歌)
아, 제발 그대가 내게 입맞춰주었으면! *
깃털처럼 가벼이 날아가 그대의 젖가슴에 닿을 수 있다면
스완의 목같이 늘씬한 그대 허리에 손을 얹고
건반에 뛰노는 손가락이 되어 그대를 연주할 수 있다면
오 하느님, 딱 한번 했으면!
꿈에라도
벌거벗은 이 꿈 들키지 말았으면! *
* 성경[아가서]의 앞부분
* 정희성시집[돌아다보면 문득]-창비
* 선시산인(仙是山人)*
조촐한 술자리였다
먼저 온 구중서가 바위마냥 요지부동인데
칠순맞이 신경림이 그 왼쪽에 앉고
얼마 있다 남정현이 와 오른쪽에 자리잡는다
내 옆에 앉아 가만히 그 모양을 바라보던
젊은 평론가 이병훈이 갑자기 눈이 똥그래지더니
내 귀에 대고 영락없이 뫼산(山)자네 하는데
조금 있다 등산복차림의 안 아무개가 쫄래쫄래 들어오니
그만 그 뫼산(山)자가 흐트러지고 만 것이었다
나는 그게 안타까워 저것 좀 봐 산이 망가졌잖아 하니까
병훈이가 얼른 알아듣고 배꼽을 잡는데
재미있는 건 뭣 모르고 따라 웃는 안 아무개였다
다른 자리에 가서 내가 이 얘기를 하니까
멀뚱하게 듣고 있던 어떤 이가 핀잔을 하듯
산이 어찌 봉우리가 셋만 있어야 한당가 하는 바람에
나는 그만 머쓱해졌다 아닌게아니라
추사의 글씨에 이런 모양의 산(山山)*자가 있기는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안 아무개 땜에 산이 무너진대서야
그걸 어찌 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산 옆에 사람이 있으니 그게 바로 신선이지 *
*김삿갓의 시에 '선시산인불불인(仙是山人佛不人)'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산(山)자 한자어(山山) 컴의 좌판에서는 찾을 수 없는 한자. 산봉우리가 둘인 형상.
* 정희성시집[돌아다보면 문득]-창비
* 시인 본색
누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 게 다 시가 아니겠냐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
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학 좋아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닭 중에도 오골계(烏骨鷄)! *
* 정희성시집[돌아다보면 문득]-창비
* 세상이 달라졌다
세상이 달라졌다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저항은 어떤 사람에게는 밥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
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
뜨거운 여름 낮의 한때처럼
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 *
*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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