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직소폭포 - 김선태

효림♡ 2009. 8. 5. 08:36

* 직소폭포 - 김선태  

얼마나 오래도록 탁한 생각을 흘려버려야
직소폭포, 저 차고 깨끗한 물빛이 되는가

얼마나 많은 주저와 두려움을 베어버려야
직소폭포, 저 꼿꼿한 풍경으로 설 수 있는가

얼마나 숱한 울음을 안으로 눌러 죽여야
직소폭포, 저 시원한 소리의 그늘을 드리우는가

그래, 저러히 높고, 크고, 깊게 걸리는 폭포로서만이
내변산 첩첩산중을 두루 흔들어 깨울 수 있는 것이리
 *

 

* 그 섬의 이팝나무 
서해 어느 쌀 한 톨 나지 않은 섬마을엔 늙은 이팝나무가 한 그루 있지요. 오백여 년 전 쌀밥에 한이 맺힌 이 마을 조상들이 심었다는 나무입니다. 평생 입으로는 먹기 힘드니 눈으로라도 양껏 대신하라는 조상들의 서러운 유산인 셈이지요. 대대로 얼마나 많은 후손들이 이 나무 밑에서 침을 꼴딱거리며 주린 배를 달랬겠습니까. 해마다 오월 중순이면 이 마을 한복판엔 어김없이 거대한 쌀밥 한 그릇이 고봉으로 차려집니다. 멀리서 보면 흰 뭉게구름 같지만 가까이서 바라보면 수천 그릇의 쌀밥이 주렁주렁 열러 있으니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지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 냄새가 사방팔방 퍼질 때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풍어제를 지냅니다. 이쯤이면 온갖 새들은 물론이고 동네 개나 닭들, 하다 못해 개미 같은 미물마저도 떨어진 밥풀을 주워먹으러 모여드니 이 얼마나 풍요로운 자연의 한마당 큰잔치입니까. 대낮이면 흰 그늘을 드리워 더위를 식혀주고 밤이면 환하게 불을 밝혀 뱃사람들의 등대 구실까지도 한다니 이만하면 조상들의 음덕치고는 참 미덥고 보배로운 것이 아닐는지요 *

 

* 딱따구리 소리
딱따구리 소리가 딱따그르르
숲의 고요를 맑게 깨우는 것은
고요가 소리에게 환하게 길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고요가 제 몸을
짜릿짜릿하게 빌려주기 때문이다

딱따구리 소리가 또 한 번 딱따그르르
숲 전체를 두루 울릴 수 있는 것은
숲의 나무와 이파리와 공기와 햇살
숲을 지나는 계곡의 물소리까지가 서로
딱,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

 

* 저녁 범종소리  

울리다, 적시다, 덮어주다, 쓰다듬다, 재우다 같은 동사를 앞세우며 간다.

 

낮다, 길다, 무겁다, 둥글다, 느리다, 너그럽다 같은 형용사들이 뒤따라간다.

 

희, 노, 애, 락, 애, 오, 욕으로 소용돌이치는 명사들도 끌어안고 간다.

 

지이잉-징 기일게 울다가 터어엉-텅 속을 비우며 운다.

 

저 소리 속에는,

 

묵묵히 쟁기를 끄는 소가 있고, 못난 자식의 가슴을 쓸어주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이 있고, 차안과 피안의 경계를 지우는 평등한 강물이 있고, 온갖 번뇌를 잠재우는 고요의 이부자리가 있고, 무엇보다 모든 것을 껴안는 넉넉한 품이 있다.

 

오늘도 만물의 귀소를 알리며

고단한 영혼들을 불러들이는 낮고 부드러운 음성 하나

긴 꼬리를 늘어뜨리며 저녁 들판을 기어간다.

 

* 보름달이 뜨면 밀밭이 쓰러진다

내 살던 자궁골짝에 달빛이 주인이던 밤이 있었다 융융한 안개가 구렁이처럼 산허리를 감싸며 흐르고

멀리서 논두렁을 달리는 들쥐 울음소리까지 가까이 들리는 그런 고요한 보름달 밤이었다

동네 울타리를 맴돌던 달빛은 무담시 처녀 총각을 불러내어선 이리저리 들판을 헤매었다 들판이며 산이며 강물조차가 온통 환하게 깔깔댈 때 여기저기서 자연스럽게 밀밭이 쓰러졌다 다음날 밀밭을 둘러보던 주인의 입가에도 보름달이 걸리었다

지금은 인공 모텔이 들어선 그 밀밭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달복이라는 이름을 가진 머슴의 딸 밀례였다

모두들 그 계집아이를 자연산이라 불렀다 황홀한 보름달의 자식이었다 *

 

* 개불

남해안 바닷가 횟집엘 가면 요상하게 생긴 횟감이 있지요. 얼른 보면 큰 지렁이 같기도 하고 무슨 동물의 창자 같기도 한

이놈의 이름은 개불. 개의 불알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자세히 보면 개좆같습니다

 

개불은 주로 연안의 모래흙탕 속에 U자형 구멍을 파고 사는데, 수축력이 워낙 뛰어나 몸을 늘였다 줄였다 하며 움직입니다.

큰 놈의 몸길이는 30센티미터, 항문 부근에 열개쯤 센털도 나 있지요. 이 놈의 몸속은 바닷물로 가득차 있어 평소엔 잔뜩 부풀어

있다가도, 물을 빼고 나면 형편없이 졸아들어 쪼글쪼글해지고 마니, 거참 영락없이 사정 후 뭣 같지 않겠습니까.

 

여자들에게 처음 개불을 먹어보라 하면 에구머니나, 망측하고 징그럽다고 기겁을 하며 내숭을 떨지만 일단 한번 먹어본 뒤에는 

달착지근하고 오들오돌 씹히는 맛이 그만 홀딱 반해서 나중엔 남편까지 내팽개치고 즈이들끼리 횟집 구석에 둘러앉아 뭐라뭐라

하염없이 키들거리며 개불을 씹는다니, 하여튼 하느님의 섭리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 김선태시집[살구꽃이 돌아왔다]-창비

 

* 낚시 이야기 2 - 허공 낚시를 하다
아직도 던질낚시를 고집하는 아마추어 꾼 김씨
한번은 혼자서 방파제에 나가 낚시를 하였는데
글쎄, 이런 기막힌 일도 벌어졌다는데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무거운 봉돌과 갯지렁이 미낄르 달아 힘껏
바다의 급소를 향해 채비를 날린 김씨, 그런데
포물선을 그리던 채비가 갑자기 허공에서 사라졌다
초장부터 낚싯줄이 터졌나 햇는데, 아니었다
낚시줄은 공중에 그대로 있었다, 팽팽했다
채비가 날아가는 바로 그 순간
주변을 맴돌며 끼륵대던 갈매기 한 마리가
잽싸게 그걸 받아 물고 날아오른 것이었다. 저런
갈매기를 살리기 위해
허공의 대물과 한참 실랑이를 벌인 김씨
가까스로 낚아버린 후 다시 허공에 방생했지만
난생처음 나는 새를 떨어뜨린 김씨는
희한한 손맛을 톡톡히 보았다, 돌연
연날리기꾼이 되고 말았다 *

* 김선태시집[살구꽃이 돌아왔다]-창비

 

* 조금새끼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는 때이지요.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은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 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은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 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웃음이 나오다가도 금세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요? 도대체 이 꾀죄죄하고 소금기 묻은 말이 자꾸만 서럽도록 아름다워지는 건 왜일까요? 아무래도 그건 예나 지금이나 이 한마디 속에 온금동 사람들의 삶과 운명이 죄다 들어 있기 때문 아니겠는지요. *

*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창비300 

 

* 홍어  
한반도 끄트머리 포구에
홍어 한 마리 납작 엎드려 있다
폐선처럼 갯벌에 처박혀 있다
스스로 손발을 묶고 눈귀를 닫아
인고와 발효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아무도 없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다 다만
이 어둡고 비린 선창 골목에서
저 혼자 붉디붉은 상처를 핥으며
충만한 외로움을 누리고 있다

그리하여 비바람 눈보라는 쳐서
그 신산고초에 제맛이 들 때
오래 곰삭아 개미*가 쏠쏠할 때
형언할 수 없는 알싸한 향기가
비로소 천지간에 가득하리라 *
*개미 : 곰삭은 맛

 

* 옛집 마당에 꽃피다 
옛집 마당을 숨어서 들여다본다

누군가 빈집을 사들여 마당에 텃밭을 가꾸었나
온갖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울며 맨발로 집을 뛰쳐나왔던 내 발자국 위에
울음꽃 대신 유채꽃 고추꽃 환하다
어머니 아버지 뒤엉켜 나뒹굴던 자리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깨꽃 메밀꽃 어우러졌다

불화의 기억 속으로 화해가 스민 것인가

가만히 귀 기울이니 식구들 웃음소리 들린다
폭력의 아버지도 눈물의 어머니도
뿔뿔이 흩어졌던 형제들도 모두들 돌아와
마당에 꽃으로 웃고 있다

슬며시 옛집 마당에 들어가 꽃으로 서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