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저녁의 염전 - 김경주

효림♡ 2009. 8. 6. 08:28

*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 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카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 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네. 그 속에서 하늘하늘

한 팬티 한 장 어머니
볼에 문질러보네. 안감이 붉어지도록
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
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무늬였음을

오늘은 그 적멸이 내 볼에 어리네.
어머니 몸소 세월로 증명했듯
삶은, 팬티를 다시 입고 시작하는 순간순간이었네.
사람들이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팬티들은 싱싱했네.
웬만해선 팬티 속 이 꽃들은 시들지

않았네.

빨랫줄에 하나씩 열리는 팬티들로 
뜬 눈송이 몇 점 다가와 곱게 물드네.
쪼글쪼글한 꽃 속에서 꽃물이 똑똑

떨어지네.
눈덩이만한 나프탈렌과 함께
서랍 속에서 일생을 수줍어하곤 했을
어머니의 오래된 팬티 한 장
푸르스름한 살 냄새 속으로

그 드물고 정하다는* 햇볕이 포근히

엉겨 붙나니. *

* 백석의 시 중에서.

 

* 저녁의 염전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염전의 어둠은 온다  

섬의 그늘들이 바람에 실려온다  

물 안에 스며 있는 물고기들  

흰 눈이 수면에 번지고 있다  

폐선의 유리창으로 비치는 물속의 어둠  

선실 바닥엔 어린 갈매기들이 웅크렸던 얼룩  

비늘들을 벗고 있는 물의 저녁이 있다  

멀리 상갓집 밤불에 구름이 쇄골을 비친다  

밀물이 번지는 염전을 보러 오는 눈들은  

저녁에 하얗게 증발한다  

다친 말에 돌을 놓아  

물속에 가라앉히고 온 사람처럼  

여기서 화폭이 퍼지고 저 바람이 그려졌으리라  

희디흰 물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 같은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그 소리의 영혼이라 부르면 안 되나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몇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들을 본다  

물의 내장을 본다 * 

* 김경주시집[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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