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정현종 시 모음

효림♡ 2009. 10. 7. 08:03

* 섬 -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하늘을 깨물었더니
하늘을 깨물었더니 비가 내리더라
비를 깨물었더니 내가 젖더라 *

 

* 바쁜듯이

정말 바쁘지는 말고

바쁜 듯이

그것도 스스로에게만

바쁜 듯이

 

한가한 시간이 드디어

노다지가 될 때까지 느긋하게

느긋하게 바쁜 듯이

 

* 행복  

산에서 내려와서 아파트촌 벤치에 앉아
한 조각 남아 있는 육포 안주로
맥주 한 병을 마시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아 행복하다!
나도 모르겠다 불행 중 다행일지
행복감은 늘 기습적으로 밑도 끝도 없이 와서
그 순간은
우주를 온통 한 깃털로 피어나게 하면서
그 순간은
시간의 궁핍을 치유하는 것이다.
시간의 기나긴 고통을
잡다한 욕망이 낳은 괴로움들을
완화하는 건 어떤 순간인데
그 순간 속에는 요컨대 시간이 없다 *

 

* 비스듬히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

 

*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 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

 

* 아침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는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 나무에 깃들여
나무들은
난 대로가 그냥 집 한 채
새들이나 벌레들만이 거기
깃들인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까맣게 모른다 자기들이 실은
얼마나 나무에 깃들여 사는지를! *

 

* 갈증이며 샘물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다
갈증이며 샘물인
샘물이며 갈증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
갈증이며
샘물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다

 

글쓰기
뭘 하느냐구요?
빛을 만들고 있어요
어두워서
자칫하면
어두워지니까

나의 안팎
자칫하면
어두워지니까

 

* 어떤 적막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로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一家를 이룬다ㅡ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 *

 

* 세상의 나무들 
세상의 나무들은
무슨 일을 하지?
그걸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
허구한 날 봐도 나날이 좋아
가슴이 고만 푸르게 푸르게 두근거리는


그런 사람 땅에 뿌리내려 마지않게 하고
몸에 온몸에 수액 오르게 하고
하늘로 높은 데로 오르게 하고
둥글고 둥글어 탄력의 샘!


하늘에도 땅에도 우리들 가슴에도
들리지 나무들아 날이면 날마다

첫사랑 두근두근 팽창하는 기운을! * 

 

* 꽃피는 애인들을 위한 노래 

겨드랑이와 제 허리에서 떠오르며

킬킬대는 滿月을 보세요

나와 있는 손가락 하나인들

욕망의 흐름이 아닌 것이 없구요

어둠과 熱이 서로 스며서

깊어지려면 밤은 한없이 깊어질 수 있는

고맙고 고맙고 고마운 밤

그러나 아니라구요? 아냐? 

그렇지만 들어보세요

제 허리를 돌며 흐르는

滿月의 킬킬대는 소리를  

 
* 견딜 수 없네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은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가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 

 

* 좋은 풍경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어 그 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봄 그 밤나무는
여러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었습니다 
 
* 交感  

밤이 자기의 심정처럼
켜고 있는 가등
붉고 따뜻한 가등의 정감을
흐르게 하는 안개
젖은 안개의 혀와
가등의 하염없는 혀가
서로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빨아들이고 있는
눈물겨운 욕정의 친화

 

무한 바깥
방 안에 있다가
숲으로 나갔을 때 듣는
새소리와 날개 소리는 얼마나 좋으냐!
저것들과 한 공기를 마시니
속속들이 한 몸이요
저것들과 한 터에서 움직이니
그 파동 서로 만나
만물의 물결
무한 바깥을 이루니......

 

*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차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 찬미 귀뚜라미  

가을이 오기는 했다마는

무슨 섬돌이라고

내 책상 아래서

소리를 내고 있는 귀뚜라미야

네 맑은 음악

네 깨끗한 소리

그다지도 열심히

그침 없이 오래오래

내 귀에 퍼부어

귓속에

마르지 않는 샘물을

세상에서 제일 맑은 샘물을

솟아나게 하고 있는

귀뚜라미야

지난 여름의 내 게으름과

게으르기 쉬운 정신을 일깨우는

17mm 작은 몸의

날개에서 울려내는

너의 소리는, 예컨데

저 모든 종교라는 것들의 경전들을

다 합해도 도무지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할

말씀이시다 실솔(蟋蟀)이여

내가 알아들을 때까지

(실은 들리자마자 알아들었거니와)

열심히, 의도한 듯 열심히

내 귀에 퍼부어

내 가슴을

세상에서 제일 맑은 샘물의

발원지로 만들고 있는

실솔이여

 

* 갈데없이  

사람이 바다로 가서

바닷바람이 되어 불고 있다든지

아주 추운데로 가서

눈으로 내리고 있다든지

사람이 따뜻한 데로 가서

햇빛으로 빛나고 있다든지

해지는 쪽으로 가서

황혼에 녹아 붉은 빛을 내고 있다든지

그 모양이 다 갈데없이 아름답습니다

 

* 불쌍하도다  

詩를 썼으면
그걸 그냥 땅에 묻어두거나
하늘에 묻어둘 일이거늘
부랴부랴 발표라고 하고 있으니
불쌍하도다 나여
숨어도 가난한 옷자락 보이도다

 

* 붉은 달    
아무도 없는 길에는
밤만이 스며서 가득 찬다
바람 속에 스며 있는 컴컴한 熱은
달고 고요하게 깊고 깊다
문뜩 저만큼, 젖은 妖氣의 空氣를 흔들며
어떤 목소리의 모습이 드러난다
한 꽃피는 처녀와 그의 젊은 남자
한 손이 다른 손에게 건너가 있고
건너가 있으면서 다시 더
깊고 안보이는 데서 만나고 있는
두 손의 걸음이 춤이 되어 넘치면서
악, 악, 까르르 처녀의 웃음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처녀의 웃음소리의 그 끝에 문뜩
붉은 달이 걸린다
웃음소리는 한없이 달을 핥으며
자꾸자꾸 그 너머로 넘어가고
붉은 달은 에코(echo)처럼 걸려 있다
 

 

* 헤게모니  

헤게모니는 꽃이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헤게모니는 저 바람과 햇빛이

흐르는 물이

잡아야 하는 거 아니예요?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내가 지금 말하고 있지 않아요?

우리가 저 초라한 헤게모니 병을 얘기할 때

당신이 헤제모니를 잡지, 그러지 않았어요?

순간 터진 폭소, 나의 폭소 기억하시죠?)

그런데 잡으면 잡히나요?

잡으면 무슨 먹을 알이 있나요?

헤게모니는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편한 숨결이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무엇보다도 숨을 좀 편히 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검은 피, 초라한 영혼들이여

무엇보다도 헤게모니는

저 덧없음이 잡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우리들의 저 찬란한 덧없음이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

* 정현종시집[세상의 나무들]-문학과지성사

 

* 事物의 꿈 1 - 나무의 꿈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

 

* 事物의 꿈 2 - 구름의 꿈

사랑하는 저녁하늘, 에 넘치는 구름, 에 부딪쳐 흘러내리는 햇빛의 폭포 
에 젖어 쏟아지는 구름의 폭포, 빛의 구름의 폭포가 하늘에서 흘러내린다  
그릇에 넘쳐 흐르는 액체처럼 加熱되어 하늘에 넘쳐흐르는 구름 
많은 감격에 가열된 눈에서 넘치는 눈물처럼 하늘에 넘쳐흐르는 구름

 

* 事物의 꿈 3 - 물의 꿈  

나는 나의 성기를 흐르는 물에 박는다. 물은 뒤집혀 흐르는 배를 내보이며 자기의 물의 양을 증가시킨다.   바람을 일으키는 물결. 가장 활동적인 운동을 시작하는 바람은 기체의 옷을 벗고 액화한다. 검은 꿀과 같은 바람. 물안개에 싸인 달의 월궁 빛깔에 젖은 반투명의 나의 꿈 위에 떠오르는 나의 성기의 불타는 혀의 눈이 확인한 성기의 불타는 혀. 불은 꺼지고 타오르는 재. 불을 흘러가게 하고 가장 뜨거운 재를 남겨주는 흐르는 물. 나의 성기를 향해 자기의 양을 증가 시키는 물!

 

事物의 꿈 4 - 사랑의 꿈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항상 生 뒤에 온다. 그대는 살아보았는가. 그대의 사랑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 

만일 타인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 뒤에 온다면 그리고 타인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 뒤에 온다면 사랑은 항상 생 뒤에 온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 정현종(鄭玄宗)시인

-1939년 서울 출생

-1965년 [현대문학] 등단, 한국문학작가상, 연암문학상, 아산문학상, 대산문학상, 2001년 미문학상 수상...

-시집 [사물의 꿈][고통의 축제][나는 별 아저씨][갈증이며 샘물인][견딜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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