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박용래 시 모음

효림♡ 2009. 10. 9. 08:34

* 꿈속의 꿈- 박용래  

지상은 온통 꽃더미 사태인데
진달래 철쭉이 한창인데
꿈속의 꿈은
모르는 거리를 가노라
머리칼 날리며
끊어진 현(弦) 부여안고
가도 가도 보이잖는 출구
접시물에 빠진 한 마리 파리
파리 한 마리의 나래짓여라
꿈속의 꿈은

지상은 온통 꽃더미 사태인데
살구꽃 오얏꽃 한창인데

 

* 엉겅퀴

잎새를 따 물고 돌아서 잔다

이토록 갈피 없이 흔들리는 옷자락

 

몇 발자국 안에서 그날

엷은 웃음살마저 번져도

 

그리운 이 지금은 너무 멀리 있다

어쩌면 오직 너 하나만을 위해

 

기운 피곤이 보랏빛 흥분이 되어
슬리는 저 능선

함부로 폈다
목놓아 진다. *

 

* 모과차(木瓜茶)

앞산에 가을비
뒷산에 가을비
낯이 설은 마을에
가을 빗소리
이렇다 할 일 없고
기인 긴 밤
木瓜茶 마시면
가을 빗소리 *

 

*추일(秋日)

나직한

꽈리 부네요
귀에
가득
갈바람 이네요
흩어지는 흩어지는
기적(汽笛)
꽃씨뿐이네요 *

* 월훈(月暈)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우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溫氣)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 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

 

* 연시(軟枾)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마을//
돌담 위//
연시(軟枾)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 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

 

* 紅枾있는 골목

바람부는 새때

아침 열시서 열한시

가랑잎 몰리듯 몰리는

골목 안 참새

갸웃갸웃 쪽문 기웃대다

쫑쫑이 집 쫑쫑이

흘린 밥알 쪼으다

지레 놀래

가지 타고 꼭지 달린

紅枾에 재잘거린다 

 

추녀에 물든 놀

용고새 용마름엔

누가 사아나

토담에 물든 놀

용마름 용고새엔

누가 사아나

 

물방울 튕기듯 재잘거린다

바람부는 새때

낮 세시서 네시 

 

* 먹감  

어머니 어머니 하고
외어 본다
이 가을
아버지 아버지 하고
외어 본다
이 가을
가을은
오십 먹은 소년
먹감에 비치는 산천
굽이치는 물머리
잔 들고
어스름에 스러지누나
자다 깨다
깨다 자다

 

* 고향
눌더러 물어 볼까
나는 슬프냐
장닭 꼬리 날리는
하얀 바람 봄 길
여기사 扶餘, 故鄕이란다
나는 정말 슬프냐

 

* 잔(殘) 

가을은 어린 나무에도 단풍 들어
뜰에 산사자(山査子) 우연듯 붉은데
벗이여 남실남실 넘치는 잔
해후(邂逅)도 별리(別離)도 더불어 멀어졌는데
종이, 종이 울린다 시이소처럼

 

* 밭머리에 서서

노랗게 속 차오르는 배추밭머리에 서서
생각하노니
옛날에 옛날에는 배추꼬리도 맛이 있었나니 
눈 덮힌 움 속에서 찾아냈었나니

 

하얗게 밑둥 드러내는 무밭머리에 서서
생각하노니
옛날 옛날에는 무꼬리 밭에 채였나니
아작아작 먹었었나니

 

달삭한 맛

 

산모롱을 굽이도는 기적 소리에 떠나간 사람 얼굴도 스쳐가나니 설핏 비껴가나니 풀무 불빛에 싸여 달덩이처럼

 

오늘은 
이마 조아리며 빌고 싶은 고향

 

* 들판

가을, 노적가리 지붕 어스름 밤 가다가 기러기 제 발자국에 놀라 노적가리 시렁에 숨어버렸다 그림자만 기우뚱

하늘로 날아 그때부터 들판에 갈림길이 생겼다 *

 

* 그 봄비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

 

* 소나기  

누웠는 사람보다 앉았는 사람 앉았는 사람보다 섰는 사람 섰는 사람보다 걷는 사람
혼자 걷는 사람보다 송아지 두, 세 마리 앞세우고 소나기에 쫓기는 사람. *

 

* 장대비

밖은 억수 같은 장대비
빗속에서 누군가 날
목놓아 부르는 소리에
한쪽 신발을 찾다 찾다
심야의 늪
목까지 빠져
허우적 허우적이다
지푸라기 한 올 들고
꿈을 깨다,깨다.
尙今도 밖은
장대 같은 억수비
귓전에 맴도는
목놓은 소리
오오 이런 시간에 난
우, 우니라
象牙빛 채찍.

 

* 별리(別離)  

 노을 속에 손을 들고 있었다, 도라지빛.//
ㅡ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손끝에 방울새는 울고 있었다. *

 

* 遮日

짓광목 차일

설핏한 햇살 

사,오백평 추녀 끝 잇던

人內 장터의 바람  

멍석깃에 말리고

도르르 장닭 꼬리에

말리고  

山그림자 기대

앉은 사람들 

황소뿔 비낀 놀

 

* 담장

梧桐꽃 우러르면 함부로 怒한 일 뉘우쳐진다.

잊었던 무덤 생각난다.

검정 치마, 흰 저고리, 옆 가르마, 젊어 죽은 鴻來누이 생각도 난다.  

梧桐꽃 우러르면 담장에 떠는 아슴한 대낮.

발등에 지는 더디고 느린 遠雷. *

 

* 설야(雪夜)  

눈보라가 휘돌아간 밤
얼룩진 벽에
한참이나
맷돌 가는 소리
고산식물처럼
늙으신 어머니가 돌리시던
오리 오리
맷돌 가는 소리

 

* 건들 장마  

건들 장마 해거름 갈잎 버들붕어 꾸러미 들고 원두막
처마밑 잠시 섰는 아이 함초롬 젖어 말아올린 베잠방이
알종아리 총총 걸음 건들 장마 상치 상치 꽃대궁 백발의
꽃대궁 아욱 아욱 꽃대궁 백발의 꽃대궁 고향 사람들 바자울 세우고 외넝쿨 거두고

 

*  雨中行

비가 오고 있다
안개 속에서
가고 있다
비, 안개, 하루살이가
뒤범벅되어
이내가 되어
덫이 되어

(며칠째)
내 木양말은
젖고 있다

 

* 은버들 몇 잎  

스치는 한 점 바람에도 갈피 없이 설레는 은버들 몇 잎을 따서 물에 띄우면 언제나 고향은 토담의 달무리.

콩꽃에 맺히는 콩꼬투리랑 절로 벙그는 목화다래랑. 아아 잔물결 잔물결 치듯 속절없이 설레는 강가 은버들.
         *
  아우야, 휘청휘청 서녘 바람 따르면 상수리숲 상수리 아람 불가
  아우야, 휘청휘청 동녘 바람 따르면 밤나무숲 밤송이 아람 불가
  비치는 쌈짓골, 비치는 비녀산. 아침 이슬 털면 아람 불가. 아롱다롱 가을에 아우야
         *
  귀뚜라미 정강이 시린 백로(白露)

* 겨울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 

 

* 박용래(朴龍來)시인

-1925~1980 충남 논산 사람

-1956년 현대문학에 [가을의 노래][황토(黃土)길]추천, 1961년 충남문화상,1980년 한국문학 작가상 수상

-시집 [싸락눈][강아지풀][백발의 꽃대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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