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이 뭉클하다 - 홍영철
날은 저물었고,
오솔길을 따라 올라간다.
나무 하나 지나고
나무 둘 지나고
나무 스물, 서른, 마흔 지나고
풀 하나 지나고
풀 둘 지나고
풀 수도 없이 지나고
숲속 거기, 그 자리에 앉는다.
멀리 하늘 위 별빛은 반짝거리는데
문득 가슴이 뭉클하다.
언제였던가?
내 가슴이 뭉클했던 때가,
너의 그 가슴이 뭉클했던 때가. *
* 너 누구니
가슴속을 누가 쓸쓸하게 걸어가고 있다
창문 밖 거리엔 산성의 비가 내리고
비에 젖은 바람이 어디론가 불어가고 있다
형광등 불빛은 하얗게
하얗게 너무 창백하게 저 혼자 빛나고
오늘도 우리는 오늘만큼 낡아버렸구나
가슴속을 누가 자꾸 걸어가고 있다
보이지 않을 듯 보이지 않을 듯 보이며 소리없이
가슴속 벌판을 또는
멀리 뻗은 길을
쓸쓸하게
하염없이
걸어가는
너 누구니?
너 누구니?
누구니, 너?
우리 뭐니?
뭐니, 우리?
도대체
* 너 어디 갔니
그때 그 꽃 어디 갔니
그 향기 어디 갔니
그 노래 어디 갔니
그 손길 어디 갔니
그 기쁨 어디 갔니
그 슬픔 어디 갔니
그 말 어디 갔니
그때 그 시간 너 어디 갔니
그 희망 너 어디 갔니
어디 갔니, 너
* 목소리
너의 목소리를 들으면
내 마음이 놓인다
너의 목소리를 들으면
내 가슴이 즐겁다
우리를 살고 싶게 하는
그 목소리여
너는 어디에 있느냐
*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
지금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으니
보여다오, 너의 가슴을
가슴에 있는 부드러운 사랑과 못난 미움과
꽃과 가시와 양과 늑대도
보여다오,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
보여다오, 너의 감추어진 곳을
거기에 있는 풀밭과 못된 함정과
피 흐르는 상처와 예리한 칼날도
보여다오,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
* 장미의 사랑
안개가 깊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로 걸어가야 합니다
당신에게로 가는 길에는
지금 불빛도 표지판도 없습니다
마음속에 놓인 빈 엽서 한 장
바다와 섬과 하늘이 있는
또 그 간격을 잇는 배와 그림이 있는
사진 엽서의 하얀 공터에다
나는 당신의 모습을 그립니다
눈은 눈빛으로
손은 손 모양으로
보이지 않는 곳은 보이지 않는 대로
이제 나는 한걸음 물러나 당신에게 장미를 바칩니다
뜨거운 꽃잎과 아픈 가시를 함께 지닌
그 배반의 꽃을 드리는 나의 손에는
향기와 피
하지만 언제나 장미를 드릴 수 있는
당신이 그 어디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 모릅니다
* 사막의 사랑
사랑을 하는 일도
사랑을 받는 일만큼 힘이 듭니다
간밤에는 바람이 불고 후드득 빗소리가 들리더니
이 새벽길은 나무며 지붕들이
모두 촉촉이 젖어 있습니다
마음이란 깃털보다 가벼워서
당신의 숨소리 하나에도
이렇게 연기처럼 흔들립니다
오늘은 당신의 목소리조차 볼 수가 없으므로
나는 사막으로 밀려가야 합니다
모래의 오르막을 오르고
모래의 내리막을 내리고
모래의 끝없는 벌판을 지나 나는 갑니다
우리의 일용할 빵 하나의 모양으로 떠 있는 태양 아래
내 몸이 소금처럼 하얗게 바래질 때
그 때
멀리 떠오르는 당신
그 신기루처럼 투명한 그리움
* 저녁,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그때는 왜 그랬는지
그때는 왜 네 곁에 서지 않았는지
손바닥 위로 자꾸만 떠오르는 하얀 별
어두운 공기 속을 흐르는 목소리
네 따뜻한 숨결
골짜기를 지나고 가시밭을 건너온
네 안타까운 발자국
네 간절히 부르는 손길
이루지 못한 꿈, 그 슬픈 사랑
그때는 왜 그랬는지
그대는 왜 네 곁에 서지 않았는지
손바닥 위로 돋아난 별들이 나를 흔드는
이 저녁, 문득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다가와서는
* 꽃잎
꽃
잎 하나가 떨어져
공중에 뜬다
그는 이미 꽃이 아니다
누가 그를 꽃이라 한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아니야
다만
그는
죽은 향기를 조금씩 뿌리다가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죽어가서
하늘이 될 뿐이다
* 겨울 숲은 따뜻하다
겨울 숲은 뜻밖에도 따뜻하다
검은 나무들이 어깨를 맞대고 말없이 늘어서 있고
쉬지 않고 떠들며 부서지던 물들은 얼어붙어 있다
깨어지다가 멈춘 돌멩이
썩어지다가 멈춘 낙엽이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시간을 붙들어놓고 있다
지금 세상은 불빛 아래에서도 낡아가리라
발이 시리거든 겨울 숲으로 가라
흐르다가 문득 정지하고 싶은 그때
* 언덕
언덕 위에 오르면
미처 바라볼 수 없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숲도 보이고 길도 보이고
사람들도 지붕들도 모두 나지막이 보입니다
언덕 위에 오르면
미처 들을 수 없었던 것들이 귀에 들어옵니다
바람 소리도 새소리도 아늑히 들립니다
골짜기가 지옥이라면
언덕은 천국입니다
이유가 깊은, 깊어서 까닭을 모를
슬픔이 개미떼처럼 밀려올 때
사라지고 싶을 때
폭파되고 싶을 때
높은 언덕 위에 올라오세요
저 아래의 풍경들이 얼마나 초라한가를
느낄 수가 있을 거예요
천국 위에서는 더욱
* 산책
오늘은 천천히 걷자
무지무지 천천히 걷자
시간은 흘러도
역사는 나아가지 않으니
문명은 높아도
정신은 올라가지 않으니
오늘은 천천히 걷자
한걸음 한걸음이
목적이요 완성이듯이
* 거울 속에는
거울 속에서 흩어지는 향기가 있다
거울 속에서 노래하는 가수가 있다
거울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있다
거울 속에서 피어나는 불꽃이 있다
거울 속에서 흩날리는 사랑이 있다
거울 속에는 또 떨어지는 잎이 있다
거울 속에는 또 쓰러지는 깃발도 있다
거울 속에는 또 가라앉는 산맥도 있다
멀어지는 풍경도 있다
너도 있다
또 있다
거울 속에는
목마르지 않은 것들이
* 우리도 익어서
열매가 익어, 익어서 떨어지듯이
우리도 떨어져서 낮게 더 낮게
떨어져서 파묻힐 수 있다면
파묻혀서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기적처럼 푸른 손 흔들며
뽀송뽀송 돋아날 수 있다면
내가 빨아먹은 천도복숭아 씨
싱싱한, 싱싱한
먼 풍경보다 더 아련한 초월도
마른 풀잎처럼 쉽게 부서지는 우리 사랑도
한숨 소리 같은 생활도
비 뿌리듯이 낮게낮게 내린다면
가을에는 우리들도 익어간다면
익어서 썩을 수 있다면
썩어서 다시 몇 갑절로 싹틀 수 있다면
*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크고 무거운 돌 하나를 만났다
돌 속에서 사람을 보았다
돌 속에 갇힌 사람을 꺼내고 싶었다
끌과 정과 망치를 집어 들었다
돌에서 사람이 아닌 돌을 깎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손도 얼굴도 벌겋게 물들었다
돌은 점점 작아지는데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돌 속에 갇힌 사람을 꺼내야 했다
끌과 정과 망치를 놓을 수 없었다
아직도 돌에서 사람이 아닌 돌을 깎고 있다
그가 돌 깨는 소리 쟁쟁쟁 허공에 퍼진다
이제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 가을과 겨울 사이
잊어버린 얼굴이 문득 떠오를 때
오래된 이름이 생각날 때
만나고 싶을 때
그래서 다시 껴안아 바라보고 싶을 때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같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지나는 햇살같이
가을과 겨울 사이를 스쳐가는
그리움 혹은 허전한 기억들
너는 좋아해봤어?
너는 사랑해봤어?
너는 임신해봤어?
너는 고독해봤어?
너는 그래서 울어봤어?
그렇게 막 말하고 싶어지는
가을과 겨울 사이
그러나 돌아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러나 바라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쓸쓸한 가을과 겨울사이
* 홍영철시인
-1955년 대구 출생
- 197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 시집 [작아지는 너에게] [너는 왜 열리지 않느냐][가슴속을 누가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