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나희덕 시 모음

효림♡ 2009. 10. 28. 08:00
* 序詩 - 나희덕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 천장호에서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

 

* 몰약처럼 비는 내리고  

뿌리뽑힌 줄도 모르고 나는

몇줌 흙을 아직 움켜쥐고 있었구나

자꾸만 목이 말라와

화사한 꽃까지 한무더기 피웠구나

그것이 스스로를 위한 弔花인 줄도 모르고

 

오늘밤 무슨 몰약처럼 밤비가 내려

시들어가는 몸을 씻어내리니

달게 와닿는 빗방울마다

너무 많은 소리들이 숨쉬고 있다

 

내 눈에서 흘러내린 붉은 진물이

낮은 흙 속에 스며들었으니

한 삼일은 눈을 뜨고 있을 수 있겠다

 

저기 웅크린 채 비를 맞는 까치는

무거워지는 날개만큼 말이 없는데

그가 다시 가벼워진 깃을 털고 날아갈 무렵이면

나도 꾸벅거리며 밤길을 걸어갈 수 있겠다

 

고맙다, 비야. ...고맙다. ...고맙다. ... *

 

* 와온(臥溫)에서  

산이 가랑이 사이로 해를 밀어넣을 때,

어두워진 바다가 잦아들면서

지는 해를 품을 때,

종일 달구어진 검은 뻘흙이

해를 깊이 안아 허방처럼 빛나는 순간을 가질 때,

 

해는 하나이면서 셋, 셋이면서 하나

 

도솔가를 부르던 월명노인아,

여기에 해가 셋이나 떴으니 노래를 불러다오

뻘 속에 든 해를 조금만 더 머물게 해다오

 

저녁마다 일몰을 보고 살아온

와온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떨기꽃을 꺾어 바치지 않아도

세 개의 해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찬란한 해도 하루에 한번은

짠물과 뻘흙에 몸을 담근다는 것을 알기에

쪼개져도 둥근 수레바퀴,

짜디짠 내 눈동자에도 들어와 있다

마침내 수레가 삐걱거리며 굴러가기 시작한다

 

와온 사람들아,

저 해를 오늘은 내가 훔쳐간다 *

* 나희덕시집[야생사과]-창비

 

* 뿌리에게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테니 *

 

* 분홍신을 신고           

음악에 몸을 맡기자

두 발이 미끄러져 시간을 벗어나기 시작했어요

내 안에서 풀려나온 실은

술술술술 문지방을 넘어 밖으로 흘러갔지요

춤추는 발이

빵집을 지나 세탁소를 지나 공원을 지나 동사무소를 지나

당신의 식탁과 침대를 지나 무덤을 지나 풀밭을 지나

돌아오지 않아요 멈추지 않아요

누군가 나에게 계속 춤추라고 외쳤죠

두 다리를 잘린다 해도

음악에 온전히 몸을 맡길 수 있다니,

그것도 나에게 꼭 맞는 분홍신을 신고 말이에요

당신에게도 들리나요?

둑을 넘는 물소리, 핏속을 흐르는 노랫소리,

나는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어요  

강물이 둑을 넘어 흘러내리듯

내 속의 실타래가 한없이 풀려나와요

실들이 뒤엉키고 길들이 뒤엉키고

이 도시가 나를 잡으려고 도끼를 들고 달려와도

이제 춤을 멈출 수가 없어요

내 발에 신겨진, 그러나 잠들어 있던

분홍신 때문에

그 잠이 너무도 길었기 때문에 * 

* 나희덕시집[야생사과]-창비

 

* 배추의 마음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ㅡ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늦가을 배추포기 묶어주며 보니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ㅡ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보다 *

 

* 시월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山門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 건 아닐까 하고
머루 한 가지 꺾어
물 위로 무심히 흘려보내며
붉게 물드는 계곡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잎을 깨치고 내려오는 저 햇살
당신 어깨에도 내렸으리라고
산기슭에 걸터앉아 피웠을 담배 연기
저 떠도는 구름이 되었으리라고,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山門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 뿐이어서
당신 이름 뿐이어서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 줄 당신은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 11월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 

 

* 별

모질고 모질어라 아직 생명을 달지 못한 별들
어두운 무한천공을 한없이 떠돌다가 가슴에 한 점 내리박히는 일

그리하여 생명의 입김을 가지게 되는 일
가슴에 곰팡이로나 피어나는 일 그 눈부심을 어찌 볼까
눈물 없이 그 앞을 질러 어떻게 달아날까 밤하늘 아래 얼마나 숨죽여 지나왔는데
얻어온 별빛 하나 어디에 둘까 어느 집 나무 아래 묻어놓을까 *

 

* 사라진 손바닥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서서히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 빝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

 

* 마른 물고기처럼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 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인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 얼음 속에서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그 빛나던 눈도 비늘도 다 시들어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

 

* 산속에서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 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 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

 

* 비에도 그림자가 
소나기 한차례 지나고
과일 파는 할머니가 비 맞으며 앉아 있던 자리
사과궤짝으로 만든 의자 모양의  
고슬고슬한 땅 한 조각
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남몰래 숨어 든 비의 그림자
자두 몇 알 사면서 훔쳐본 마른 하늘 한 조각
 *

 

* 빗방울, 빗방울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

 

* 비오는 날에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 줄 수도 있는
이 비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

* 그런 저녁이 있다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에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 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들으려 한다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넣으며
가만 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
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
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

 

* 빗방울에 대하여

1. 빗방울이 구름의 죽음이라는 걸 인디언 마을에 와서 알았다

빗방울이 풀줄기를 타고 땅에 스며들어
죽은 영혼을 어루만지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2. 인디언의 무덤은
동물이나 새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빗방울이 멀리서도 길을 찾아올 수 있도록

3. 새 형상의 무덤은 흙에서 날고
사슴 형상의 무덤은 아직 풀을 뜯고 있다
이 비에 풀이 다시 돋아날 것이다

4. 나무들은 빗방울에게 냄새로 이야기한다
숲은 향기로 소란스럽고
오래된 나무들은 빗방울의 기억을 털고 있다

5. 쓰러진 나무는 비로소 쓰러진 나무다
오랜 직립의 삶에서 놓여난
나무의 맨발을 빗방울이 천천히 씻기고 있다

6. 빗방울은 구름의 기억을 버리고 이 숲에 왔다
그러나 누운 뼈를 적시고 
구름과 천둥의 시절로 돌아갈 것이다

7. 구름이 강물의 죽음이라는 걸 인디언 마을에 와서 알았다
죽은 영혼을 어루만진 강물이
햇빛에 날아오르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

* 나희덕시집[야생사과]-창비

 

* 야생사과
어떤 영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붉은 절벽에서 스며나온 듯한 그들과

목소리는 바람결 같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풀을 뜯고 있는 말,
모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선명한 저녁이었다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주었다

새가 쪼아먹은 자리마다 
개미들이 오글거리며 단물을 빨고 있었다

나는 개미들을 훑어내고 한입 베어물었다
달고 시고 쓰디쓴 야생사과를

그들이 사라진 수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바람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그들이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물었을 뿐인데 *

* 나희덕시집[야생사과]-창비

 

* 귀뚜라미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숨 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

* 나희덕(羅喜德)시인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뿌리에게] 등단, 1998년 김수영문학상, 2007년 김소월문학상 수상

-시집 [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야생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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