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이문재 시 모음

효림♡ 2009. 10. 29. 08:04
* 소금창고 - 이문재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 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떼를 세어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

 

* 시월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벗어던진다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

 

노독(路毒)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 거미줄  

거미로 하여금

저 거미줄을 만들게 하는

힘은 그리움이다

 

거미로 하여금 거미줄을 몸 밖

바람의 갈피 속으로 내밀게 하는 힘은 이미

기다림을 넘어선 미움이다 하지만

그 증오는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어서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팽팽하지 않은 기다림은 벌써

그 기다림에 진 것, 져 버리고 만 것

 

터질 듯한 적막이다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

* 이문재시집[산책시편]-민음사

 

* 푸른 곰팡이 -산책시1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가는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 이문재시집[산책시편]-민음사

 

* 마지막 느림보 -산책시 3  
이곳에선 아무도 걷지를 않습니다
내쳐 달리거나 길바닥 위에서
쓰러질 뿐입니다


이 도시는 느슨한 산책을 아주
싫어하는 모양입니다 산책은 아니
산책만이 두 눈과 귀를 열어 준다는 비밀을
이 도시는 알고 있는 것이겠지요
도시는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저 반짝이는
유토피아의 초대장들로 길 안팎에서
산책을 훼방하는 것이지요

도시는 단 한 사람의 산책자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느림보는
가장 큰 죄인으로 몰립니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혼자 있으려 하다간
도시에게 당하고 말지요
이 도시는 산책의 거대한 묘지입니다 * 

* 이문재시집[산책시편]-민음사 

 

* 덕수궁에서 고개를 드니 -산책시 7 

덕수궁에 입장해서 보았다

대궐의 지붕과 저 처마는 얼마나 이중적인가

하늘에서 내려다보기에 그 지붕은 매우 다소곳하게 흘러내리는 선이지만

땅에서 한번 올려다보라 이 거대한 처마는 하늘을 향해 바싹 고개를 쳐들고 있다

하늘에선 보이지 않는다   

 

왕들은 저러한 구조에서 평안했다 *

* 이문재시집[산책시편]-민음사 

 

* 농담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
 
* 저물 녘에 중얼거리다 

우체국이 사라지면 사랑은

없어질 거야, 아마 이런 저물 녘에

무관심해지다보면, 눈물의 그 집도

무너져 버릴 거야, 사람들이

그리움이라고, 저마다, 무시로

숨어드는, 텅 빈 저 푸르름의 시간

봄날, 오랫동안 잊고 있던 주소가

갑자기 떠오를 때처럼, 뻐꾸기 울음에

새파랗게 뜯기곤 하던 산들이

불켜지는 집들을 사타구니에 안는다고

중얼거린다, 봄밤

쓸쓸함도 이렇게 더워지는데

편지로, 그 주소로 내야 할 길

드물다, 아니 사라진다

노을빛이 우체통을 오래 문지른다

그 안의 소식들 따뜻할 것이었다 *

* 이문재시집[산책시편]-민음사

 

* 월광욕
달빛에 마음을 내다 널고
쪼그려 앉아
마음에다 하나씩
이름을 짓는다//
도둑이야!
낯선 제 이름 들은 그놈들
서로 화들짝 놀라
도망간다//
마음 달아난 몸
환한 달빛에 씻는다//
이제 가난하게 살 수 있겠다 *

 

*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뵌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 물의 결가부좌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을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 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은 만큼 깊이 비치고, 바람은 부는 만큼만 잔물결 일으키고, 넘치는 만큼만 흘러넘치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물의 결가부좌가 오늘 같은 열엿샛날 신새벽에도 눈 뜨고 있느냐.

 

눈뜨고 있어서, 보름달 이우는 이 신새벽 
누가 소리 없이 뗏목을 밀지 않느냐, 뗏목에 엎드려 연꽃 사이로 나아가지 않느냐,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지 않느냐,  

수천수만의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 제 온몸을 넓은 귀로 만드는 사내, 거기 없느냐.

 

어둠이 물의 정수리에서 떠나는 소리 
달빛이 뒤돌아서는 소리, 이슬이 연꽃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 이슬이 연잎에서 둥굴게 말리는 소리,  

연잎이 이슬방울을 버리는 소리, 연근이 물을 빨아올리는 소리, 잉어가 부레를 크게 하는소리, 진흙이 뿌리를 받아들이는 소리,

조금 더러워진 물이 수면 쪽으로 올라가는 소리, 뱀장어 꼬리가 연의 뿌리들을 건드리는 소리, 연꽃이 제 머리를 동쪽으로

내미는 소리, 소금쟁이가 물 위를 걷는 소리, 물잠자리가 제 날개가 있는지 알아보려 한 번 날개를 접어보는 소리ㅡ

 

소리, 모든 소리들은 자욱한 비린 물냄새 속으로 
신새벽 희박한 빛 속으로, 신새벽 바닥까지 내려간 기온 속으로,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으로 제 길을 내고 있으리니,  

사방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리니.

 

어서 연못으로 나가 보아라. 
연못 한 가운데 뗏목 하나 보이느냐, 뗏목 한가운데 거기 한 남자가 엎드렸던 하얀 마른 자리 보이느냐,  

남자가 벗어놓고 간 눈썹이 보이느냐, 연잎보다 커다란 귀가 보이느냐, 연꽃의 지문, 연꽃의 입술 자국이 보이느냐,  

연꽃의 단냄새가 바람 끝에 실리느냐.

 

고개 들어 보라. 
이런 날 새벽이면 하늘에 해와 달이 함께 떠 있거늘, 서쪽에는 핏기 없는 보름달이 지고, 동쪽에는 시뻘건 해가 떠오르거늘,  

이렇게 하루가 오고,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오고, 모든 한살이들이 오고가는 것이거늘, 거기, 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결가부좌 트는 것이 보이느냐. * 

 

* 파꽃 

저런 ‘속없는’ 양념 같으니라구.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그 속을 어따가 비웠을까. 가만, 저 양반 우습게 볼 일 아니네. 속은 없어도 맵기는 이렇게 맵고, 뼈 한 마디 없어도 꼿꼿하기 이를 데 없네. 세상에 얕보고 허투루 볼 것 없음을 저이로 하여 다시금 알겠네. 조상 대대로 ‘음심’과 ‘분노’를 일으킨다 하여 절 밖에 쫓긴 물건(五辛菜)이었건만, 속 비우고 맘 비워서 저 홀로 사원이 되었구나. 닝닝닝-, 봄날 파밭 한 뙈기 날마다 초파일이로구나. 대파대사, 쪽파보살의 ‘무심법’을 들으러 저 속 빈 사원을 찾는 벌과 풍뎅이 신도가 무릇 기하이뇨.

 

* 등명 (燈明) 
등명 가서 등명 낙가사 가서
심지 하나로 남고 싶었다
심지의 힘으로 맑아져
작은 등명이고 싶었다
어떤 지극함이 찾지 않아
하얀 심지로 오래 있어도 좋았다
등명리에 밤이 오고
바다의 천장에 내걸린 수백 촉 집어등
불빛에 가려진 깊은 밤그늘이어도 좋았다
질문을 만들지 못해 다 미쳐가는
어떤 간절함이 찾아왔다가
등명을 핑계대며 발길질을 해도 좋았다 
심지 하나로 꼿꼿해지면서
알았다 불이 붙는 순간
죽음도 함께 시작된다는 것을
좋았다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 그리워
죽을 지경이라는 어떤 그리움이 찾아와
오래된 심지에 불을 당길 터 *

 

* 저녁 燈明
저녁 등명에 가면 불 들어 온다
7번 국도 초입, 동해 초입
낮에는 눈부셔 눈뜨지 않는 해안
없는 듯 엎드려 있는 마을, 燈明
집어등 점점이 수평선 새로 그을 즈음
마을은 한낮에 고인 빛을 모아
저마다 하나씩 등을 단다
모든 집이 연등으로 살아나
연등 속에 있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심지가 된다
어둠이 내려야 등명이 되는 등명리
땅에 다 와서 스스로 깊이를 잃는
동해도 등명 앞에서는 순해진다
마음 캄캄하던 사람들도

저녁 등명에 가면 불이 켜진다
밤바다, 집어등 사이로
새파란 길이 보인다 *

 

* 이문재시인

-1959년 경기도 김포 출생 
-1982 [시운동]-[우리 살던 옛집 지붕] 등단, 1999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2002년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집 [내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산책시편][마음의 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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