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나종영 시 모음

효림♡ 2009. 10. 24. 09:45

* 우수(雨水) - 나종영 
선암사 해천당 옆에
수백년 묵은 뒷간 하나 있습니다
거기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문 틈새 이마 위로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목어(木魚) 흔들어 깨우고 가는
청솔 바람소리 보입니다
부스럭부스럭 누군가 밑닦는 소리 들리는데
눈 맑은 동박새가
매화 등걸 우듬지에 앉아
두리번두리번 뭐라고 짖어댑니다
천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새로운 천년이 무섭게 밀려오는지
그 울음소리 대숲 하늘 한 폭 찢어놓고
앞산머리 훠이 날아갑니다
하릴없이 대나무 대롱 끝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 찬물을 삼키다가 옳거니
매화꽃 봉오리 움트는 소리
겨울 산그늘 얼음꽃 깨치고
봄 햇살 걸어오는 것 보았습니다 *

 

相生詩篇 - 지렁이

밭이랑을 고르다가

온몸으로 꿈틀거리는 너를 본다

징그럽게 살아 꿈틀거리는 너를 보며

살아 있는 것이 스멀거리는 촉촉한 밭 위에 내가

맨발로 서 있음을 나는 비로소 안다

이 흙 안에서 너는 온몸으로 몇 백년 몇 천년을 면면히 살아왔으리

나도 네가 사는 흙 속에서 징그럽게 살아가리라

돼지벌레 굼벵이 명주잠자리애벌레가

뒹굴며 함께 살고 있는 풀뿌리 환한 세상 안에서

 

* 금강산 길   
금강산 밟고 온
아흔여덟 심재린 옹에게
남한 TV 기자 양반 신이 나서 묻습니다
금강산 관광객 가운데
최고령이신데 다음에 또 오시겠습니까?
"그것은 두더지에게 물어봐야지요
두더지 땅속에 사는디 내 죽어 땅속에
묻히면 못 올 거고, 뭐 살아도 못 오겠지요"
그 말뜻 알아듣지 못한 기자 양반
유람선 갑판에서 또 마이크 들이대지요
금강산 아름답지요?
"그것은 물어 뭐하게요 내 오십년 넘게
두더지처럼 살았는데......
금강산 관광 십년 이어지면 통일이 십년 늦어지겠지요"
? ? ! ! !

 

* 노랑붓꽃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

 
작은 풀 이파리만 한 사랑 하나 받고 싶었을까 나는
상처가 되고 싶었네

 
노란 꽃잎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병든 몸이 뜨거워지고,
나는 사랑이 곧 상처임을 알았네

 
지난봄 한철 햇살 아래 기다림에 몸부림치는
네 모습이 진정 내 모습임을

 
노랑붓꽃 피어 있는 물가에 서서
내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나는 사랑했으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내 안에 있음을,
나는 상처를 사랑하면서 알았네 *

 

늦잠
이슬 먹은 애기메꽃 활짝 핀 아침
홑이불 돌돌 말고 늦잠 자는 나에게
울 엄니 내 등 톡톡 두드리며 말씀했지요
애야 똥구녕에 해 받치겠다
솜결 같은 그 말에도 머뜩잖아
퍼뜩 일어나기 싫어 이불 속에 숨었지요

 

나 이제야 그 말 뜻 헤아려
늦잠 자는 아들녀석에게 쏘아붓지요
이놈들아 똥구녕에 해 떨어진다
꾸물대는 아이들 보면 화가 나서
냅다 이불 빼앗고 발로 차 일으키지요

 
나 그때나 지금이나
아직 사람 노릇 하기 멀었지요 *

 

마음 안에 풀꽃 하나
나는 창 밖을 보고
어두운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대는 창 밖을 보고
한 줄기 아름다운 별빛을 봅니다

 
나는 숲길을 가며
홀로 외로움에 몸을 떨고
그대는 풀숲을 거닐며
들꽃 향기에 마음이 푸르러집니다

그대는 하얀 눈송이에도
그리운 사람 환한 얼굴을 그리고
나는 사람들의 하찮은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고 찡그린 얼굴이 됩니다

 

햇살 해맑은 이 아침
새롭게 깨어나고픈 나는 누구입니까
마음 안에 풀꽃 하나, 그대는
이미 사랑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선암매*
은목서나무에서 새가 울고 있더라
無憂殿 기와담장 너머로
노을이 지고, 산그늘 어둠이 내리고
운수암 가는 길 선암매 피지 않았더라
 
오래된 사랑이란 보여주지 않는 것
한 잎 붉은 사랑도 언젠가 늙은 등걸에 드문드문 피는 것
굽이굽이 길 위에 산수유 피고
길 너머 길가에, 노란 생강나무도 피어
마음이 비어있는 내 사랑아
 
그대 그윽한 꽃향기 같은 봄바람은 깊은 香 차밭을 돌아
下弦 달빛에 젖고
은목서나무 가지에서 이름 모를 새가 울고
꽃망울 머금은 선암매 아직은 피지 않았더라
 
* 순천 선암사에 피는 수 백년 된 토종매화로 이를 仙巖梅라고 부른다.
이른 봄이 되면 선암사 대웅전 뒤 무우전 옆 돌담길에 고목등걸의 홍매화 청매화 설(雪)매화가 구름처럼 어우러져 핀다.

 

* 솔나리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내가 수천의 말로 사랑한다고 해도
너는 또 물을 것이다 사랑하냐고
그래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정말 사랑해
네가 붉은 꽃잎 다 떨구고
새벽 햇살 아래 하얀 이마를 찧어도
나는 되물을 것이다 사랑하냐고
그래 사랑은 언제나
세상 밖으로 길을 내는 것이니까
사랑은
네가 처음 그렇게 서 있던 자리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내 마음 산비탈 길에
갓 피어오르는 솔나리  
마알간 꽃대궁 같은것ㅡ

 

* 찔레꽃
손 한번 잡아보지 않고
마음으로 사랑했던 여자
헤어지던 날 하얀 찔레꽃 울타리
달빛이 터지고
시린 손목이 서러웠지
이제 나는 안다
그것이 내 젊은 날 품었던 생가시였음을
살아가는 동안
뒤돌아 손조차 흔들 수 없는, 수많은 이별이
새떼처럼 몰려왔다는 것을
찔레꽃 울타리 저문 돌무더기
누군가 밟고 지나간 풀섶
애기돌무덤 까맣게 몰랐다는 것을

 

* 山菊 

산국 하나 꺾어 그대에게 줄까

서릿발 하얀 산길에 노란 산국 몇 송이

그대 그리워 그리워

몸져 누우면

그대가 꽃병에 향기를 담아

머리맡에 내려올까

뒤돌아 먼발치

그냥 그 꽃핀 자리 고이 두고 온

늦가을 내 사랑 하나

 

* 세족(洗足)
이 세상 낮고 서늘한 곳으로
내려서고 싶다
누군가 내 발등을 씻어주고
발끝에 입맞춤을 하는 순간, 눈썹이 떨듯
내 마음에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산벚꽃 진 자리에 노랑매미꽃이 피고
어디선가 골짜기 찬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길이 끝나는 어디메쯤 홀연히
날개를 접고 싶었던 좀청실잠자리
물소리 따라 날아가고 있다
가던 길 되돌아보면 아름다워 눈물나는
애기똥풀 코딱지꽃 얼레지 밑씻개풀
키가 낮아 이 세상에 상처 한 잎
내밀지 못한 애잔한 들꽃들의 시린 발등을
나 언제 씻어준 적이 있었던가
마른 꽃잎 적시고 가는 물소리
눈을 뜨면 눈물나게 아름다운 그대들의 삶마냥
낮은 데로 흘러가는 살여울 물가에 남아
오래오래 발목을 적시고 싶다

 

* 내 사랑 각시붕어
그날 둘이서 배 터져라 먹었던
꽁보리밥 한 소쿠리 구수한 맛
아직도 입안에 가득한데
흐린 강물 따라 흘러갔나 내 열한 살 시절
양 볼때기 버짐꽃 피어 통마늘로 문지르던 얼굴들
지금은 어디 갔나

맑은 개울가 책보따리 풀어놓고
함께 놀던 버들치 버들붕어 피라미 모래무지
달개비 잎 띄어놓은 아기 연못가 손 모아 불렀던
물방개 소금쟁이 꽃새우 송사리떼
모두 다 어디 갔나

물잠자리 날던 물수세미 물풀 사이
무지갯빛 수놓으며 내 마음 훔쳐간
내 사랑 각시붕어
그날 저 너머 보리밭 강 건너 하늘 멀리
포롱포롱 쇠종다리 날던
내 마음 깨끗한 날

 

* 물잠자리
망초꽃 흐드러지게 핀
물숲 가장자리에 물잠자리떼 날고 있다
너울너울 검은 날개를 저으며
물가에 앉았다 바람에 흔들렸다가
가던 길을 가지 않고
저문 물소리 흐느끼는
망초꽃밭을 맴돌고 있다
어디를 에돌다가 늦여름 혀를 빼문
망초꽃 잔돌가에 떼무덤을 만들려는가 보다
어디서 본 듯한 동자승 하나
제 키를 덮는 풀숲 너머로 사라지고
어어 서른 몇 해 전이었던가
네 꽁무니에 지푸라기를 꽂고
진홍빛 성냥불을 사납게 그어대었던 것이
어이 미안하다
내 뺨에 화인(火印)처럼 박혀 있는
검은 날개의 세월이여
그 때 정신없이 염천 하늘로
치솟아 곤두박질쳤던 물잠자리
달빛 으스러지는 망초꽃밭
산그늘 물빛 그윽한 이 곳이
오늘 비로소 물잠자리로 환생한 내 무덤인가 보다
 

 

* 얼레지

이것이 사랑이라면

가만히 무릎을 꺾고 그대 앞에

눈물을 훔치리

이것이 그리움이라면

그대 눈빛 속에

남아있는 저녁 물빛으로

마른 가슴을 적시리

사랑은 그것이 사랑이고자 할 때

홀연 식어서 가을 잠자리처럼 떠나감으로

나는 깊은 새벽 산기슭에

한 잎 붉은 얼레지로 피어 나겠네

이것이 사랑이라면

그대 앞에 꽃잎의 그늘을 어루만지는

시린 물방울, 그것의 침묵이 되겠네 

 

* 나종영시인

-1954년 전남 광주 출생
-1981년 [창작과 비평]사의 13인 신작시집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시작활동,[5월 시]동인
-시집 [끝끝내 너는]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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