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우체국 시 모음

효림♡ 2009. 10. 12. 08:37

* 장승포우체국 - 정호승   

바다가 보이는 장승포우체국 앞에는 키 큰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그 소나무는 예부터 장승포 사람들이 보내는 연애편지만 먹고 산다는데

요즘은 연애편지를 보내는 이가 거의 없어

배고파 우는 소나무의 울음소리가 가끔 새벽 뱃고동소리처럼 들린다고 한다

어떤 때는 장승포항을 오가는 고깃배들끼리 서로 연애편지를 써서 부친다고 하기도 하고

장승포여객선터미널에 내리는 사람들마다 승선권 대신 연애편지 한장 내민다고 하기도 하고

나도 장승포를 떠나기 전에 그대에게 몇통의 연애편지를 부치고 돌아왔는데

그대 장승포우체국 푸른 소나무를 바라보며 보낸 내 연애의 편지는 잘 받아보셨는지

왜 평생 답장을 주시지 않는지 * 

* 정호승시집[포옹]-창비

 

* 이팝나무 우체국 - 박성우 
이팝나무 아래 우체국이 있다
빨강 우체통 세우고 우체국을 낸 건 나지만
이팝나무 우체국의 주인은 닭이다
부리를 쪼아 소인을 찍는 일이며
뙤똥뙤똥 편지 배달을 나가는 일이며
파닥파닥 한 소식 걷어 오는 일이며
닭들은 종일 우체국 일로 분주하다
이팝나무 우체국 우체부는 다섯이다
수탉 우체국장과 암탉 집배원 넷은
꼬오옥 꼭꼭 꼬옥 꼭꼭꼭, 열심이다
도라지 밭길로 부추 밭길로 녹차 밭길로
흩어졌다가는 앞다투어
이팝나무 우체국으로 돌아온다
꽃에 취해 거드름 피는 법이 없고
눈비 치는 날조차 결근하는 일 없다
때론 밤샘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다
빨강 우체통에 앉아 꼬박 밤을 새고
파닥 파다닥 이른 우체국 문을 연다
게으른 내가 일어나거나 말거나
게으른 내가 일을 나가거나 말거나
게으른 내가 늦은 답장을 쓰거나 말거나
이팝나무 우체국 우체부들은
꼬오옥 꼭꼭 꼬옥 꼭꼭꼭, 부지런을 떤다

 

빨간 우체통 앞에서 - 신현정
새를 띄우려고 우체통까지 가서는 그냥 왔다
오후 3시 정각이 분명했지만 그냥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그냥 왔다
난 혓바닥을 넓게 해 우표를 붙였지만 그냥 왔다
논병아리로라도 부화할 것 같았지만 그냥 왔다
주소도 우편번호도 몇 번을 확인했다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그대여 그 자리에서 발길을 돌려서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알 껍질을 톡톡 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새여 하늘은 그리도 푸르렀건만 그냥 왔다
새를 조각조각 찢어버리려다가
새를 품에 꼬옥 보듬어 안고 그냥 왔다.

* 장생포 우체국 - 손택수 
지난 밤 바다엔 폭풍주의보가 내렸었다
그 사나운 밤바다에서 등을 밝히고
누구에게 무슨 긴 편지를 썼다는 말인지
배에서 내린 사내가 우체국으로 들어온다
바다와 우체국의 사이는 고작 몇미터가 될까 말까
사내를 따라 문을 힘껏 밀고 들어오는 갯내음,
고래회유해면 밖의 파도 소리가
부풀어오른 봉투 속에서 두툼하게 만져진다
드센 파도가 아직 갑판을 때려대고 있다는 듯
봉두난발 흐트러진 저 글씨체,
속절없이 바다의 필체와 문법을 닮아 있다
저 글씨체만 보고도 성난 바다 기운을 점치고
가슴을 졸일 사람이 있겠구나
그러고 보면 바다에서 쓴 편지는 반은 바다가 쓴 편지 
바다의 획순을 그대로 따라간 편지
수평선을 긋듯 반듯하게 접은 편지를 봉투 속에 집어넣고
뭍에 올랐던 파도 소리 성큼성큼 멀어져간다
뿌- 뱃고동 소리에 깜짝 놀란 갈매기 한 마리
우표 속에서 마악 날개를 펴고 있다

 

* 명자나무 우체국 - 송재학 
올해도 어김없이 편지를 받았다
봉투 속에 고요히 접힌 다섯 장의 붉은 태지(苔紙)도 여전하다
화두(花頭) 문자로 씌어진 편지를 읽으려면
예의 붉은별무늬병의 가시를 조심해야 하지만
장미과의 꽃나무를 그냥 지나칠 순 없다
느리고 쉼 없이 편지를 전해주는 건
역시 키 작은 명자나무 우체국,
그 우체국장 아가씨의 단내 나는 입냄새와 함께
명자나무 꽃을 석삼년째 기다리노라면,
피돌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아가미로 숨쉬니까
떨림과 수줍음이란 이렇듯 불그스레한 투명으로부터 시작된다
명자나무 앞 웅덩이에 낮달이 머물면
붉은머리오목눈이의 종종걸음은 우표를 찍어낸다
우체통이 반듯한 붉은색이듯
단층 우체국의 적별돌에서 피어나는 건 아지랑이,
연금술을 믿으니까
명자나무 우체국의 장기 저축 상품을 사러 간다 *

* 송재학시집[진흙 얼굴]-랜덤하우스코리아

 

* 가을 우체국 - 문정희 

가을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다가
문득 우체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인보다 때론 우체부가 좋지
많이 걸을 수 있지
재수 좋으면 바닷가도 걸을 수 있어
은빛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낙엽 위를 달려가
조요로운 오후를 깨우고

돌아오는 길 산자락에 서서
이마에 손을 동그랗게 얹고
지는 해를 한참 바라볼 수 있지

 

시인은 늘 앉아만 있기 때문에
어쩌면 조금 뚱뚱해지지

 

가을 우체국에서 파블로 아저씨에게
편지를 부치다가 문득 시인이 아니라
우체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가 아니라 내가 직접
크고 불룩한 가방을 메고
멀고 먼 안달루시아 남쪽
그가 살고 있는
매혹의 마을에 닿고 싶다고 생각한다 *

* 문정희시집[지금 장미를 따라]-뿔 

 

* 우체국 가는 길 - 이해인
세상은
편지로 이어지는
길이 아닐까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하나
미루나무로 줄지어 서고
사랑의 말들이
백일홍 꽃밭으로 펼쳐지는 길

설레임 때문에
봉해지지 않는
한 통의 편지가 되어
내가 뛰어가는 길

세상의 모든 슬픔
모든 기쁨을
다 끌어안을 수 있을까

작은 발로는 갈 수가 없어
넓은 날개를 달고
사랑을 나르는
편지 천사가
되고 싶네, 나는 *

* 이해인시집[작은 위로]-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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