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황동규 시 모음 2

효림♡ 2009. 9. 30. 09:31

* 탁족(濯足) - 황동규   

휴대폰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갑다

아주 적적한 곳

늦겨울 텅 빈 강원도 골짜기도 좋지만

알맞게 사람 냄새 풍겨 조금 덜 슴슴한

부석사 뒤편 오전(梧田)약수 골짜기

벌써 초여름, 산들이 날이면 날마다 더 푸른 옷 갈아입을 때

흔들어봐도 안 터지는 휴대폰

주머니에 쑤셔넣고 걷다 보면

면허증 신분증 카드 수첩 명함 휴대폰

그리고 잊어버린 교통범칙금 고지서까지

지겹게 지니고 다닌다는 생각!


시냇가에 앉아 구두와 양말 벗고 바지를 걷는다

팔과 종아리에 이틀내 모기들이 수놓은

생물과 생물이 느닷없이 만나 새긴

화끈한 문신(文身)들!

인간의 손을 쳐서

채 완성 못 본 문신도 있다

 

요만한 자국도 없이

인간이 제풀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어디 있는가?

* 황동규시집[우연에 기댈때도 있었다]-문지

 

* 손 털기 전  

누군가 말했다

'머리칼에 먹칠을 해도

사흘 후면 흰 터럭 다시 정수리를 뒤덮는 나이에

여직 책들을 들뜨게 하는가,

거북해하는 사전 들치며?

이젠 가진 걸 하나씩 놓아주고

마음 가까이 두고 산 것부터 놓아주고

저 우주 뒤편으로 갈 채비를 해야 할 땐데.' 

 

밤중에 깨어 생각에 잠긴다.

'얼마 전부터 나는 미래를 향해 책을 읽지 않았다.

미래는 현재보다도 더 빨리 비워지고 헐거워진다.

날리는 꽃잎들의 헐거움,

어떻게 세상을 외우고 가겠는가?

나는 익힌 것을 낯설게 하려고 책을 읽는다.

몇 번이고 되물어 관계들이 헐거워지면

손 털고 우주 뒤편으로 갈 것이다.' 

 

우주 뒤편은

어린 날 숨곤 하던 장독대일 것이다.

노란 꽃다지 땅바닥을 기어

숨은 곳까지 따라오던 공간일 것이다.

노곤한 봄날 술래잡기하다가

따라오지 말라고 꽃다지에게 손짓하며 졸다

문득 깨어 대체 예가 어디지? 두리번거릴 때

금칠金漆로 빛나는 세상에 아이들이 모이는

그런 시간일 것이다. * 

* 문태준엮음[포옹,당신을 안고 내가 물든다]-해토 

 

* 삶의 맛

환절기, 사방 꽉 막힌 감기!
꼬박 보름 동안 잿빛 공기를 마시고 내뱉으며 살다가,
체온 38도 5분 언저리에서 식욕을 잃고
며칠 내 한밤중에 깨어 기침하고 콧물을 흘리며
소리 없이 눈물샘 쥐어짜듯 눈물 흠뻑 쏟다가,
오늘 아침 문득
허파꽈리 속으로 스며드는 환한 봄 기척.

이젠 휘젓고 다닐 손바람도 없고
성긴 꽃다발 덮어주는 안개꽃 같은 모발도 없지만
오랜만에 나온 산책길, 개나리 노랗게 울타리 이루고
어디선가 생강나무 음성이 들리는 듯
땅 위엔 제비꽃 솜나물꽃이 심심찮게 피어 있다.
좀 늦게 핀 매화 향기가 너무 좋아 그만
발을 헛디딘다.
신열 가신 자리에 확 지펴지는 공복감, 이 환한 살아 있음!
봄에서 꽃을 찾을까, 징하게들 핀 꽃에서
봄을 뒤집어쓰지.
광폭(廣幅)으로 걷는다.
몇 발자국 앞서 뛰는 까치도 광폭으로 뛴다.
이 세상 뜰 때
제일로 잊지 말고 골라잡고 갈 삶의 맛은
무병(無病) 맛이 아니라 앓다가 낫는 맛?
앓지 않고 낫는 병이 혹
이 세상 어디엔가 계시더라도. *

* 황동규시집[겨울밤 0시 5분]-현대문학

 

* 방파제 끝

언젠가 마음 더 챙기지 말고 꺼내놓을 자리는
방파제 끝이 되리.
앞에 노는 섬도 없고
헤픈 구름장도 없는 곳.
오가는 배 두어 척 제 갈 데로 가고
물 자국만 잠시 눈 깜박이며 출렁이다 지워지는 곳.
동해안 어느 조그만 어항
소금기 질척한 골목을 지나
생선들 함께 모로 누워 잠든 어둑한 어물전들을 지나
바다로 나가다 걸음 멈춘 방파제
환한 그 끝. *

 

* 꿈, 견디기 힘든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
나는 알아들었다
발 사이로 보이는 눈발
새벽 무렵이지만
날은 채 밝지 않았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

 

* 달밤   
누가 와서 나를 부른다면
 내 보여주리라
 저 얼은 들판 위에 내리는 달빛을.
 얼은 들판을 걸어가는 한 그림자를
 지금까지 내 생각해 온 것은 모두 무엇인가.
 친구 몇몇 친구 몇몇 그들에게는
 이제 내 것 가운데 그중 외로움이 아닌 길을
 보여주게 되리.
 오랫동안 네 여며온 고의춤에 남은 것은 무 엇인가.
 두 팔 들고 얼음을 밟으며
 갑자기 구름 개인 들판을 걸어갈 때
 헐벗은 옷 가득히 받는 달빛 달빛. *

 

*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의 바퀴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가쁜 언덕길을 오를 때
자동차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길 속에 모든 것이 안 보이고
보인다. 망가뜨리고 싶은 어린 날도 안 보이고
보이고, 서로 다른 새떼 지저귀던 앞뒤 숲이
보이고 안 보인다. 숨찬 공화국이 안 보이고
보인다. 굴리고 싶어진다, 노점에 쌓여있는 귤,
옹기점에 엎어져 있는 항아리, 둥그렇게 누워 있는 사람들,
모든 것 떨어지기 전 한 번 날으는 길 위로. *

* 황동규시집[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문지

 

* 소형 백제불상(小形 百濟佛像) -정감록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변주 中  

슬픔도 쥐어박듯 줄이면
증발하리, 오른발을
편히 내놓고, 흐르는 강물보다
더욱 편히, 왼팔로는
둥글게 어깨와 몸을 받치고
곡선으로 모여서 그대는
작은 세계를 보고 있다. 조그만
봄이 오고 있다. 나비 몇 마리
날고, 못가에는 가혹하게
작고 예쁜 꽃들도 피어 있다.  
기운 옷을 입고 산들이 모여 있다.  
그 앞으로 낫을 든 사람들이 달려간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가.  
어디로, 그리고 우리는?
그대는 미소짓는다.  
미소, 극약(劇藥)병의 지시문을 읽듯이
나는 그대의 미소를 들여다 본다.  
축소된다, 모든 것이, 가족도 친구도
국가도, 그 엄청나게 큰 것들,
그들 손에 들려진 채찍도
그들 등에 달린 끈들도, 두려운 모든 것이 발각되는 것으로,
돌이킬 수 없는 엎지름으로,
엎지름으로, 다시 담을 수 없는. *

* 황동규시집[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문지

 

* 가을날, 다행이다

며칠내 가랑잎 연이어 땅에 떨어져 구르고
나무에 아직 붙어 있는 이파리들은 오그라들어
안 보이던 건너편 풍경이 눈앞에 뜨면
하늘에 햇기러기들 돋는다.

냇가 나무엔 지난여름 홍수에 실려 온
부러진 나뭇가지 몇 걸려 있고
찢겨진 천 조각 몇 점 되살아나 팔락이고 있다.

쥐어박듯 찢겨져도 사라지긴 어렵다.
찢겨져도 내쳐 숨쉰다. 

검푸른 하늘에 기러기들 돌아온다.
다행이다.
오다 말고 되돌아가는 놈은 아직 없다.
오다 말고 되돌아가는 하루도 아직은 없다.
오늘은 강이 휘돌며 모래 부리고 몸을 펴는 곳
나그네새들과 헤어진 일 감춰둔 곳을 찾아보리라. *

* 황동규시집[겨울밤 0시 5분]-현대문학

 

* 얼음꽃
찬 서리 흰 별빛처럼 내린 아침,

커피 한잔 없이 들숨날숨만 데리고

얼음꽃 황홀하게 핀 나무들 사이를 걸었습니다.

추위가 회칼 같은 것으로 제 생살 저미듯 환히 피운 꽃

마음의 살을 막 저미는 꽃,

허나 걷다가 어디쯤서 뒤돌아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시듦도 떨어짐도 없이 지워져 있는 꽃.

 

눈에 하얀 고리 무늬를 그린 동박새가

눈가루를 뿌리며 납니다.

햇빛이 갑자기 가루로 빛납니다.

눈 알갱이 하나하나에 뛰어들어

사라지는 빛의 입자들,

만난 것 채 알아채기도 전에 벌써

오늘 그리운 얼굴이 찰칵! 방금 눈앞에서

옛 그리움이 되는 꽃. *

* 황동규시집[겨울밤 0시 5분]-현대문학

 

 * 몰운대는 왜 정선에 있었는가? -지구여 그래도 하늘만은!   

  1
  김명인 시인과의 사전 계획은
  계획을 벗어나는 일,
  지도(地圖) 벗어나 새로 지도 그리는 일.
  그의 차 바퀴의 궤적에 몸을 맡기고.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조반 설친 김시인이 맨손체조하듯 차를 몬다,
  한국시의 장래를 걱정하며
  (모든 장래여 엿먹어라!)
  알짜 강원도의 초입 진부까지.
 
  2
  새로 닦은 길로 무작정 들어선다.
  오대산 물과 평창 언덕들의 대비
  언덕과 하늘의 대비.
  하늘은 갈수록 녹음빛.
  창 열고 산림욕하며 차를 몬다.
  누군가 이곳에 댐을 만들려 들지나 않을까?
  몇 십 길 나무의 정기(精氣)를 누가 물로 바꿔?
  나무 체취에 취해
  삼척으로 질러가는 길을 잊어버리고
  산골로 정선으로 녹음의 현장으로 차를 몬다.
 
  3
  이젠 어떤 선(線) 어떤 면(面) 어떤 색(色)이 인간의 마음을 구해주리라 믿지 않는다. 어떤 믿음이 믿음을 구해주리라고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봄꽃 다 지고 가을꽃떼 채 출몰하기 전 이 산천의 녹음, 저 무선(無線) 무형(無形) 무성(無聲)의 색은 어느 품보다도 더 두터운 품, 어느 멈춘 시간보다도 더 흐트러지지 않은 시간. 감자전을 맛보기 위해 잠시 세운 차 앞에 물결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망설이고 있다. 봄 쪽으로 갈까, 가을 쪽으로 갈까? 저 조그만 노랑 들꽃 위에 그냥 머물러 있거라, 이 마음 뒤집히는 녹음 속에.
 
  4
  지난 몇 년간 정선은 내 숨겨놓은 꿈, 너무 달아 내쉬다 도로 들이켠 한 모금 공기, 쓰다 못 쓴 뜨거운 시, 애인, 포장 안 된 순살결의 길. 어떤 길은 내 차의 머플러를 너무 애무해 병들게도 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길이 포장되었다. 비행기재도 뚫리고 강릉길도 터지고 진부에서도 직행길이 났다. 길가에 널리는 라면 봉지들, 깨어진 소주병들. 남아 있는 위험 표지판만이 희미한 옛사랑의 흔적일 뿐 마음 온통 빨아들이던 산들도 오늘은 정신놓고 웅크리고 있다. 그러나 그 위로 아직, 그렇지 아직, 녹음 켜고 있는 하늘, 녹음의 혼(魂).
 
  5
  몰운대에선 지난번 인사만 하고 헤어진
  벼락 맞아 오히려 자연스레 자란 소나무가
  우리를 맞아준다.
  바위옷 찢겨진 바위들이 늘었을 뿐
  주중(週中) 오후의 적막.
  벼랑 밑에선, 저런, 하얀 오리들이 놀고 있구나.
  오리들을 어루만지는 저건 뭐지?
  아 하늘 녹음.
  오리들이 하늘에서 헤엄쳐 다닌다.
  땅에서 흙덩이처럼 녹음 한 덩이가 하늘로 떨어진다.
  퐁당!
  하늘이 되받아 짙푸르러진다.
  하늘과 땅의 흥겨운 장단(長短)!
  눈 한 번 질끈 감는다.
  김명인 시인이 갑자기 웃고
  벼락 맞은 나무가 간신히,
  그렇다 흐르는 시간이 슬쩍 흐름 늦추어,
  내 몸을 막아준다. *
  
  * 황동규시집[미시령 큰바람]-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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