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정호승 시 모음 2

효림♡ 2009. 9. 29. 08:38

* 안개꽃 - 정호승  

얼마나 착하게 살았으면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으면
죽어서도 그대로 피어 있는가
장미는 시들 때 고개를 꺾고
사람은 죽을 때 입을 벌리는데
너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똑같구나
세상의 어머니들 돌아가시면
저 모습으로
우리 헤어져도
저 모습으로

 

* 꽃과 나 
꽃이 나를 바라봅니다
나도 꽃을 바라봅니다
꽃이 나를 보고 웃음을 띄웁니다
나도 꽃을 보고 웃음을 띄웁니다
아침부터 햇살이 눈부십니다
꽃은 아마
내가 꽃인 줄 아나봅니다 

 

* 꽃

마음속에 박힌 못을 뽑아
그 자리에 꽃을 심는다
마음속에 박힌 말뚝을 뽑아
그 자리에 꽃을 심는다
꽃이 인간의 눈물이라면
인간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꽃이 인간의 꿈이라면
인간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

* 정호승시집[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 강물을 따라가며 울다 

내 몸 속에 석가탑 하나 세워놓고
내 꿈 속에 다보탑 하나 세워놓고
어느 눈 내리는 날 그 석가탑 쓰러져
어느 노을 지는 날 그 다보탑 와르르 무너져내려
눈 녹은 물에 내 간을 꺼내 씻다가
그만 강물에 흘러보내고 울다
몇날 며칠 강물을 따라가며 울다 *

* 정호승시집[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 오동도
오늘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내가 보고 싶다고
막차라도 타고 올라오겠다고
편지해놓고
오동도만 올라와서 서울역에
동백꽃 향기만 가득하다

* 질투
가을날 가랑비가
가랑잎만 사랑한다
나는 너무너무 질투가 나서
가랑비가 그칠 때까지
가랑잎으로
나뒹굴었다

* 너에게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 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 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

 

* 수련

물은 꽃의 눈물인가

꽃은 물의 눈물인가

물은 꽃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고

꽃은 물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다

새는 나뭇가지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고

눈물은 인간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다

 

* 가을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 석련(石蓮)  

바위도 하나의 꽃이었지요

꽃들도 하나의 바위였지요

어느 날 당신이 나를 찾은 후

나의 손을 처음으로 잡아주신 후

나는 한 송이 석련으로 피어났지요

시들지 않는 연꽃으로 피어났지요


바위도 하나의 눈물이었지요

눈물도 하나의 바위였지요

어느 날 당신이 나를 떠난 후

나의 손을 영영 놓아버린 후

나는 또 한 송이 석련으로 피어났지요

당신을 향한 연꽃으로 피어났지요

 

* 꽃다발  

네가 준 꽃다발을

외로운 지구 위에 걸어놓았다


나는 날마다 너를 만나러

꽃다발이 걸린 지구 위를

걸어서 간다

 

* 꽃향기

내 무거운 짐들이 꽃으로 피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
버리고 싶었으나 결코 버려지지 않는
결국은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고 질질 끌고 온
아무리 버려도 뒤따라와 내 등에 걸터앉아 비시시 웃고 있는
버리며 버릴수록 더욱더 무거워져 나를 비틀거리게 하는
비틀거리면 비틀거릴수록 더욱더 늘어나 나를 짓눌러 버리는
내 평생의 짐들이 이제는 꽃으로 피어나
그래도 길가에 꽃향기 가득했으면 좋겠네

 

* 사막
들녘에 비가 내린다
빗물을 듬뿍 머금고
들녘엔 들꽃이 찬란하다
사막에 비가 내린다
빗물을 흠뻑 빨아들이고
사막은 여전히 사막으로 남아 있다

받아들일 줄은 알고
나눌 줄은 모르는 자가
언제나 더 메말라 있는
초여름
인간의 사막

* 가을 꽃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 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 꽃이여

* 또 기다리는 편지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 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 이별노래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 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 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 나팔꽃  

한쪽 시력을 잃은 아버지

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

까만 나팔꽃 씨를

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

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

 
* 산산조각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 

 

 *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하늘의 별로서 슬픔을 노래하며
어디에서나 간절히 슬퍼할 수 있고
어디에서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슬픔처럼 가난한 것 없을지라
가장 먼저 미래의 귀를 세우고
별을 보며 밤새도록 떠돌며 가소서
떠돌면서 슬픔을 노래하며 가소서
별 속에서 별을 보는 나그네 되어
꿈 속에서 꿈을 보는 나그네 되어
오늘밤 어느 집 담벼락에 홀로 기대보소서

 

 *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사람을 멀리하고 길을 걷는다.
살아갈수록 외로와 진다는
사람들의 말이 더욱 외로와
외롭고 마음 쓰라리게 걸어가는
들길에 서서
타오르는 들불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고독하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면
어둠 속에서 그의 등불이 꺼지고
가랑잎 위에는 가랑비가 내린다

 

* 운주사에서
꽃 피는 아침에는 절을 하여라
피는 꽃을 보고 절을 하여라
걸어가던 모든 길을 멈추고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서서
부처님께 절을 하듯 절을 하여라

꽃 지는 저녁에도 절을 하여라
지는 꽃을 보고 절을 하여라
돌아가던 모든 길을 멈추고
헤어졌던 사람과 나란히 서서
와불님께 절을 하듯 절을 하여라 *
 

* 정호승시집[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 당신에게  

오늘도 당신의 밤하늘을 위해

나의 작은 등불을 끄겠습니다

 

오늘도 당신의 별들을 위해

나의 작은 촛불을 끄겠습니다

 

* 맹인수녀 

앞 못 보는 아들을 둔 늙은 어머니가

부처님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다 등을 달아달라고

돈 몇천원을 스님 손에 꼬옥 쥐여주면서

간절히 부탁하는 모습을

초파일날 조계사 앞을 지나가던 맹인수녀가

발그레 웃으면서 바라보다가

가슴에 촛불 하나 밝히고 길 떠납니다 *

 

* 맹인 부부 가수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 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 

 

* 불일폭포 

폭포에 나를 던집니다
내가 물방울이 되어 부서집니다
폭포에 나를 던집니다
갑자기 물소리가 그치고
무지개가 어립니다
무지개 위에
소년부처님 홀로 앉아
웃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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