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나태주 시 모음 2

효림♡ 2009. 9. 28. 09:03

* 바람이 부오 - 나태주  

바람이 부오

이제 나뭇잎은 아무렇게나 떨어져

땅에 딩구오

나뭇잎을 밟으면

바스락 소리가 나오

그대 내 마음을 밟아도

바스락 소리가 날는지

   

* 노을

방안 가득

노래로 채우고

세상 가득

향기로 채우고

내가 찾아갔을 때는

이미 떠나버린 사람아

그 이름조차 거두어 간 사람아

서쪽 하늘가에

피빛으로 뒷모습만

은은히 보여 줄 줄이야

 

* 떠나와서

떠나와서 그리워지는

한 강물이 있습니다

헤어지고 나서 보고파지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미루나무 새 잎새 나와
바람에 손을 흔들던 봄의 강가
눈물 반짝임으로 저물어가는
여름날 저녁의 물비늘
혹은 겨울 안개 속에 해 떠오르고
서걱대는 갈대숲 기슭에
벗은 발로 헤엄치는 겨울 철새들
헤어지고 나서 보고파지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떠나와서 그리워지는
한 강물이 있습니다

* 사람 그리워
나는 열 번을 죽어 다시 태어나도
사람으로 태어나리
사람 중에서도 사람 그리워
밤잠을 설치고
두 눈이 진무르는
이냥 이대로 못난
사내로 태어나리
그리하여 다시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다시 헤어져
그대 그리워 잠 못 드는 밤을
혼자 가지리


* 금강 가에서  

강물이 흘러 노래가 되고
산이 변하여 그림이 될 때까지
바람은 강물을 떠날 수 없고
구름은 산을 버릴 수 없는 거야

 

그대 눈물이 고여 별이 되고
나의 한숨이 모여 꽃이 될 때까지
그대는 그렇게 오래 멀리 있어야 하고
나는 이렇게 혼자 있어야 하는 거야
  
* 금강 가에서 1 
밤 사이 잘 있었을까
밤 사이 여전할까
궁금해지고 보고파지는 강물
사람도 아니데
강물을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려진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강물도 나처럼 매일같이
내가 보고 싶어질까 몰라

* 희망

그대 만나러 갈 땐
그대 만날 희망으로
숨쉬고
그대 만나고 돌아올 땐
그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
희망으로 또한
나는 숨쉽니다

* 그냥 멍청히
그냥 멍청히
앉아 있어도 좋은 산 하나
모두 변하는 세상에
변하지 않아서 좋은
돌멩이 하나
모두 흐르는 세상에
흐르지 않아서 맑은
샘물 하나
더러는 시골 담장 밑에 피어 웃음웃는
일년초처럼
잊혀진 개울의 낡은 다리처럼

* 조화
산이 있기에/강이 있고
산이 푸르기에/강도 푸르고
산이 깊기에/강도 저러이 깊소
산에 뛰노는 산짐승/강에 뛰노는 물고기
그대 있기에/나도 있고
그대 쉼쉬기에/나도 오늘 숨을 쉬오
그대 가슴엔/나의 산짐승
나의 가슴엔/그대 물고기
  
*
 깊은 밤에
내가 밤에 혼자 깨어
외로워할 때
자기도 따라서
혼자 깨어 외로워하는 사람

 

내가 앓으며
가슴이 엷어져 갈 때
자기도 따라서
앓으며 가슴이 엷어져 가는 사람

 

세상에 한 사람쯤
있어 줄까 몰라
그것을 재산 삼아
나는 오늘도 살아가고
내일도 살아갑니다

* 비밀
언뜻언뜻 치마를 걷어올리며
눈부신 무르팍을 보여 주시는 그대여
허연 허벅지의 속살을 보여 주시는 그대여
나에게만 보여 주시지 말고
하늘에게도 보여 주시오
그대 못 견디게 부풀어오른 가슴의 두 산봉우리
슬프도록 아름답게 휘어져내린 산등성이
이윽고 그대 우거진 수풀이며
향기로운 골짜기
나에게만 보여 주시지 말고
바람에게도 보여 주시오
그대 검은 머리칼에 오래도록 가려 있던
조그맣고 귀여운 두 개의 귀
그리고 귀밑에 숨겨져 있어
그대도 모르는 새까만 점 하나

* 막동리 행
해저문 들길에
검정염소가 알은 체를 하오
반갑소
손을 흔들어 줄까 하오
  

* 가을 귀향
막걸리 두어 대접이면
눈물이 나리
해질녘 서쪽 하늘에
붉게 물든 구름에
얼굴 부비며
막걸리 두어 대접이면 그대
차마 눈물이 나리

 

* 골목길

해가 많이 짧아졌소
문득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가
나를 놀라게 하오
혼자 나는 비둘기 한 마리가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하오
바라보니
빈 하늘

* 선물
받는 것은 될수록 줄여서 받고
주는 것은 될수록 늘려서 주리
그대 내게 주시는 것
비록 작더라도
큰 상으로 알고 받겠으니
내가 주는 것 비록 크더라도
작은 별로 바꾸어 받으시라. *

* 여자
아무리 고운 여자라도
사랑해 주지 않으면
천박한 여자가 되고 맙니다

 

이것은 그대가
그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 기념일
모름지기 하루 하루를
기념일로 생각하며
살아갈 일이다
오늘은 모처럼
비가 오신 기념일
산의 나무와 풀들이 비를 맞고 신이 나서
새로이 숨을 쉬면서 손을 흔들며
내게 눈짓을 보내오지 않는가!
오늘은 비 온 기념으로 퇴근길에
나나 무수꾸리의 음반이나 하나 사고
영화나 그럴 듯한 것으로 한 편 보아야겠다

* 오후
사과 썩는 냄새가
향기로운
가을날 오후
맑은 햇살 얼비치는
창가에 앉아서
그대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대의 몸매음이 어쩌면
사과 썩는 냄새와 비슷했고
그대 눈빛이
가을 햇빛처럼
맑지 않았던가 짐작해 보았습니다

* 다락방
이담에 집을 마련한다면
지붕 위에 다락방 하나 달린 집을
마련하겠습니다
문틈으로 하늘 구름도 잘 보이고
바람의 옷소매도 잘 보일 뿐더러
밤이면 별이 하나 둘 돋아나는 것도
곧잘 볼 수 있는
그러한 다락방을 하나
마련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속상하거나 답답한 날은
다락방에 꽁꽁 숨으렵니다
그대도 짐작 못하고
하느님도 찾지 못하시도록

* 비었다
들판은/비었다
마음도/비었다

비인 들판과 마음/사이

아침 저녁으로/안개와 연기가/채워주었다
갈대꽃은/죽어서도 하얗게/손 흔들며 웃고 있었다

* 강마을을 따라서
억새풀 어우러진/숲길에서
꽃 한 송이 꺾어들지/마시구려
바람 어지럽게 오가는/들길에서
흰구름을 바라보지/마시구려
그대 계신 곳은 아침마다/안개 구름 피어올라
산을 가리우는/백리길
그러나 마음은/만리길

* 숨은그림 찾기
아름다운 사람이
꺾어주면
여뀌풀꽃 그 천한 꽃도
고귀한 꽃이 됩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노래 부르면
유행가 그 흔한 곡조도
아름다운 노래가 됩니다

 

저만큼 빨간 등산복차림
혼자 서 있는 가을 삽화
나만 아는
숨은그림 찾기입니다

* 모두 떠난 자리에
모두 떠난 자리에
그대 단 하나
내게는 소중한 행운입니다

 

무너져 내린 가을꽃밭
그대 단 하나
내게는 빛나는 꽃송입니다

 

바람 부는 산성 위에
오로지 그대
꺾이지 않는 하나의 나무입니다

* 가을 밤비
실타래에서
실을 풀어내듯
내리는 비, 밤비

 

쉬었다 쉬었다가
생각나면 속삭이듯
내리는 비, 가을비

 

감나무 잎새에 내려선
굵은 비가 되고
내 가슴에 내려선
쓸쓸한 비가 되오

 

비로 하여 더욱
깊어지는 밤
밤으로 하여 더욱
가까워지는 빗소리

* 이유
당신은 왜 내가
우산을 가졌으면서
우산을 펼치지 않고 그냥
길을 가는지 모르시지요?
두 손에 가방을 들었기 때문이라구요?
아닙니다
당신이 받쳐주는 우산속에 나도 들어가
당신과 함께 걸어보고 싶어서입니다

* 유월에
말없이 바라
보아주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합니다

 

때때로 옆에 와
서 주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따뜻합니다

 

산에 들에 하이얀 무찔레꽃
울타리와 덩쿨장미
어우려져 피어나는 유월에

 

그대 눈길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나는
황홀합니다

 

그대 생각 가슴 속에
안개 되어 피어오름만으로도
나는 이렇게 가득합니다

* 안개지역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우리는
누군가한테 완벽하게 정복당한 뒤였다

 

밤새도록 잠을 설친 사람들은 눈을 비비며
강가로 나와 답답한 가슴으로
바튼 기침을 했다

 

세상 모두 다 변한 뒤에도
변하지 않는 오직 한 사람
간직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헛된 욕심일까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건
차리리 만용일까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우리는
내가 아닌 또 하나의 내가 되어 있었다

 

나날이 여위어 가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한사코 사람들은 강가에 나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만 했고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고만 했다

* 옆자리
옆자리에 계신 것만으로도 나는
따뜻합니다
그대 숨소리만으로도 나는
행복합니다
굳이 이름을 말씀해 주실 것도 없습니다
주소를 알려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굳이 나의 이름을
알려 하지를 마십시오
이름 없이 주소 없이 그냥
곁에 앉아계신 따스함만으로도
그대와 나는 가득합니다
보이지 않는
그대와 나의 가슴 울렁임만으로도
우리는 황홀합니다
그리하여 인사 없이 눈짓 없이
헤어지게 됨도
우리에겐 소중한 만남입니다

* 가을은 쓸쓸한 나에게
가을은 쓸쓸한 나에게
더욱 쓸쓸해 하라고

 

혼자 걸어가는 여자의
바바리 코트를 보여 주고

 

길가에 떨어져 빗방울에 밟히는
은행잎을 보여 주고

 

길게길게 저물어 사라지는
언덕의 노을을 보여 줍니다

 

가을은 쓸쓸한 나에게
더욱 쓸쓸해 하라고

* 통화
자면서도 나는
그대에게 전화를
걸고 있습니다

 

그대 생각만으로 살았다고
내일도 그대 생각 가득할 것이라고

 

자면서도 나는
그대로부터 전화를 
받고 있습니다

* 그립다
쓸쓸한 사람 가을에
더욱 호젓하다

 

맑은 눈빛 가을에
더욱 그윽하다

 

그대 안경알 너머
가을꽃 진 자리
무더기 무더기

 

문득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
그립다

* 너는 흐르는 별
너는 흐르는 별
나도 또한 흐르는 별

 

어제 간 곳을 오늘 또
지나친다 말하지 말자

 

어제 만난 것들을 오늘 또
만난다 생각 말자

 

비록 어제 간 길을 가고
어제 본 산과 들과 나무들을 보며
어제 만난 너와 내가 다시 만나지만

 

어제의 너와 나는 죽고
어제의 산과 들과 나무는
더불어 죽고

 

오늘의 너는 새로이 태어난 너
오늘의 나는 새로이 눈을 뜬 나

 

오늘 우리는 새로이 만나고
오늘 우리는 새로이 반짝인다

 

너는 흐르는 별
나도 또한 흐르는 별

* 사랑은 혼자서
사랑은 여럿이가 아니라
혼자서 쓸쓸한 생각
저무는 저녁해
그리고 깜깜한 어둠

 

사랑은 둘이 아니라
혼자서 푸르른 산맥
흐르는 시내
그리고 풀벌레 울음

 

사랑은 너와 함께가 아니라
혼자서 이루는 약속
머나먼 내일
그리고 이별과 망각

* 사랑은 구름 너머
사랑은 구름 위에
사랑은 바람 너머

 

세상은 언제나 나에게 낯선 곳
세상은 언제나 나에게 힘겨운 곳

 

숨쉬기 위해서 그대를 사랑했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 그대를 사랑했다
슬프지 않기 위해서 그대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대를 사랑할수록
숨쉬기는 더욱 힘들었고
외로움은 커졌으며
슬픔 또한 늘어났다

 

아, 그대를 사랑함은 나에게
형벌의 강물이었다

 

사랑은 바람 위에
사랑은 구름 너머

* 가난한 사랑
그대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나도 가난한 가슴이 되어
베옷 입고 찬비 맞으며
오두막 단칸방에 살겠습니다

 

그대가 죄지은 사람이라면
나도 천둥벌거숭이 죄인이 되어
그대 들어간 감옥을 따라가든지
마음 속에 감옥 하나 따로 짓겠습니다

 

그대가 병든 사람이라면
나도 불치병 앓는 환자가 되어
그대 옆에 자리깔고 누워
죽음의 나라를 들락거리겠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왕이시라면
나는 천하고 낮은 신하가 되어
그대 발 아래 고요히 무릎 꿇고
그대 시키는 어떠한 일이라도 따르려 합니다

* 쓸쓸한 사랑
이제 우리에게도 고요한 날
두 그루의 푸르른 나무가 되어
그윽한 눈빛 하나만으로 말없이도
바라보게 하여 주십시오

 

이제 우리에게도 햇빛 밝은 날
두 줄기의 향기론 풀잎이 되어
부드러운 어깨로 마주 
기대이게 하여 주십시오

 

이제 우리에게도 바람 맑은 날
두 송이의 어여쁜 꽃이 되어
가여운 모가지를 하늘 호수에
흔들리게 하여 주십시오

 

이제 우리에게도 쓸쓸한 사랑
쓸쓸한 삶의 뒤안길
쓸쓸한 대로 투정하지 말게
하여 주십시오

* 산 하나
얼마나 오래 기다리고 애를 태우면
산 하나 가슴 속에
솟게 할 수 있을까

 

구름 고깔로 쓰고
새와 바람도 찾아와 놀게 하는
산 하나
솟아나게 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발치에
반짝이는 뱀비늘의
맑은 강물 하나 또
흐르게 할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래 견디고 헤어져 있으면
그대 내게 와
아름답고 따뜻한 산이 되고
서러운 서러운 강물이 되게 할 수 있을까

* 별 하나
그림자를 지우고
소문을 버리고
어두어져가는 산으로 들어갑니다

 

맑은 물소리 한 소절
만날 듯 싶어
깨끗한 개구리 울음소리 한 마당
들릴 듯 싶어

 

아직도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산으로 들어갑니다
차갑고 향기로운 바람끝에
반짝 돋아나는
별 하나

 

저 별은 누구의
눈물 자국입니까

* 꽃 하나 노래 하나
꽃 하나
찾으려고
세상에 왔다가

 

노래 하나
얻으려고
세상 헤매이다가

 

꽃도 노래도
찾지 못하고

 

나는 여기
땅바닥에 주저앉아
발부비며 울고 있습니다

 

그대여 나를
데려가 주세요
 

* 하오의 슬픔
세상에 와서 내가
한 일이라곤 고작
글 몇 줄 쓴 일밖에 없는데
공연스레
하얀 종이만 함부로
버려 놓고 말았구려

 

세상에 와서 내가
한 일이라곤 고작
그대 좋아한 일밖에 없는데
공연스레
그대 고운 마음만
아프게 만들고 말았구려

 

어느날 찬 물에 손을
씻다가 본  손에 묻었던 파아란 잉크빛
그 번져나가는 슬픔을 보면서
  
* 씁쓸한 삶의 향기
비린내나는/젊은 시절엔/모르리
맹물맛 뒤에 숨어나는/씁쓰름한/삶의 향기
혼자라도 좋고/둘이라면 더욱/좋으리
갈 사람 가고/올 사람 온/하오의 한때

마른 입술 적셔주는/화사한/고독

차라리/색동옷 입혀/마주 앉히리
눈보라 스러지는/봄의 언덕 푸르름 속에
새로 움트는 안단테 아다지오
드디어 청산도/아는 체하고 흰구름도
같이 와 놀자 하네
 
* 꽃이 되어 새가 되어  

지고 가기 힘겨운 슬픔 있거든

꽃들에게 맡기고

 

부리기도 버거운 아픔 있거든
새들에게 맡긴다

 

날마다 하루해는 사람들을 비껴서
강물 되어 저만큼 멀어지지만

 

들판 가득 꽃들은 피어서 붉고
하늘가로 스치는 새들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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