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시간의 동공 - 박주택

효림♡ 2010. 2. 19. 07:48

* 시간의 동공 - 박주택
이제 남은 것들은 자신으로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만 바다를 그리워한다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말 한 마리
아주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들이 그 위를 비추면
창백한 호흡을 멈춘 새들만이 나뭇가지에서 날개를 쉰다
꽃들이 어둠을 물리칠 때 스스럼없는
파도만이 욱신거림을 넘어간다
만리포 혹은 더 많은 높이에서 자신의 곡조를 힘없이
받아들이는 발자국, 가는 핏줄 속으로 찾아드는
금잔화, 생이 길쭉길쭉하게 자라 있어
언제든 배반할 수 있는 시간의 동공들
때때로 우리들은 자신 안에 너무 많은 자신을 가지고
북적거리고 있는 자신 때문에 잠이 휘다니
기억의 풍금 소리도 얇은 무니의 떫은 목청도
저문 잔등에 서리는 소금기에 낯이 뜨겁다니,
갈기털을 휘날리며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말 한 마리
꽃들이 허리에서 긴 혁대를 끌러 바람의 등을 후려 칠 때
그 숨결에 일어서는 자정의 달
곧이어 어디선가 제집을 찾아가는 개 한 마리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을 토하며
어슬렁어슬렁 떫은 잠 속을 걸어 들어간다 *

* 2005년 소월시문학상 수상작

 

* 이별의 역사 

극장 앞에는 의자가 놓여 있네

그 의자 비에 젖네 가을비 내려 뒹구는 잎사귀 젖고

술집의 문고리도 젖어 잠마저 젖는 어느 가을날

이별이 이토록 쉬운 것이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네

기억은 가물거리지도 않고 평생을 바친 힘으로

한사코 망각을 물리치네. 이것이 누구의 이별이든

모든 이별에는 흐느낌이 있네. 잠 못 드는 저 애인들

 

술집에서, 작은방에서, 깊은 시름에서

그림자마다 조금씩은 비에 젖고 인간의 역사가

이별의  역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올지라도

이별은 언제나 처음인 것을 그리하여, 몸은 아프고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고 두려운 아침이 오지만

그러나 이별도 순환하여 사랑이 사랑과 만나는 것처럼

이별도 이별과 만나 사랑이 낳은 이별을 힘껏 껴안는 것이라네 *

* 박주택시집[시간의 동공]-문학과지성사 

 

이별가 1  

곳곳이 꽃이고 곳곳이 꽃인데
그냥 가시렵니까, 집은, 달은 저만치서 헤매이고
눈썹마저 강으로 던져버리면
아무리 저문 문틀이라지만 벌레 끼어 웁니다
그러니 덤불에는 눕지 마시고 꽃가지 꺾어
꽃잎에 섞여 마른 빛으로 나십시오
고르고 고른 마음 모진 어둠을 갉을 때
먼 곳으로부터 잠이 옵니다
이것이 이별을 위하는 것이라면 새벽을 달래
장에 적시겠습니다, 곳곳마다 꽃이어서
잔가지만 하더라도 수북이 여기에 있는데
다만 울음을 멈춘 벌레를 따르렵니다
달이 비추는 길에 서 계시는 하얀 옷자락이시여

* 박주택시집[시간의 동공]-문학과지성사 

 

* 지조론

견딜 때까지 견디게나

최후의 악이 부드럽게 녹아

인격이 될 때까지

고통?

 

견디게나

편안한 시간이란 쉬 오지 않는 법

상처가 깊으면 어때

깊을수록 정신은 빳빳한 법

 

생각 끝의 끝에서라도

견디게나.

그 어떤 비난이 떼를 지어 할퀸다 할지라도

벼랑 끝에 선 채로 최후를 맞을지라도

 

아무렴! 끝끝내 견디다가

산맥의 지리쯤은 미리 익혀 놓은 후

영영 죽을 목숨일 때

바위, 뻐꾸기, 청정한 나무

뭐 그쯤으로 환생하게 * 

 

* 보성 여인숙  

저 집의 초라한 눈빛

늙은 개처럼 꼬리를 늘어뜨리고

게저분하게 웅크리고 있네

삭정이 삐걱 나와

눅눅한 햇볕을 쬘 때까지

사연 많은 사람들

초라한 집 뱃속에 누워

일어나질 않네

순대국처럼 모락 모락

김이 성기는 굴뚝 위로

곰삭은 바람

길을 잃고 머뭇거리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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