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

놓아두고 가기 - 법정스님

효림♡ 2010. 3. 12. 00:27

* 놓아두고 가기

 

내 지갑에는 자동차 운전면허증과 도로공사에서 발행한 고속도로 카드와  종이쪽에 적힌 몇 군데 전화번호

그리고 약간의 지폐가 들어 있다.  또 올해의 행동지침으로 적어 놓은 초록빛 스티커가 붙어 있다.
 연초에 밝힌 바 있듯이 금년의 내 행동지침은 이것이다. 
 첫째, 과속 문화에서 탈피
 둘째, 아낌없이 나누기
 셋째, 보다 따뜻하고 친절하기

 그런데 최근에 와서 한 가지를 더 추가하기로 했다.
 넷째, 놓아두고 가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여름 안거 결제날, 우리들 영혼의 스승 조주선사의 가풍을 이야기한 끝에 여러 대중 앞에서 내 결심을 밝혔다.

길상사를 드나들면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어 간다. 그때마다 마음이 개운치 않고 아주 무겁다.

말로는 무소유를 떠벌이면서 얻어 가는 것이 너무 많아 부끄럽고 아주 부담스러웠다.

늙은 중이 욕심 사납게 주는 대로 꾸역꾸역 가지고 가는 꼴을 이만치서 바라보고 있으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지난 초파일 밤, 음악회를 등지고 빗속을 달려오면서 현재 나 자신의 살림살이를 냉엄하게 살펴보았다.

나는 지금 나 자신답게 살고 있는가? 자기 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출가수행자의 분수를 지키고 있는가?
혼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시시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밖에서 간섭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자기 자신이 만들어 가야 한다.


누가 되었건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음식물이 되었건 그 밖의 일상용품이 되었건 개인이 쓸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15년 가까이 그 고장에 살다보니 이웃이 몇 집 생겼다. 주로 오두막에 일이 있을 때 불러다 쓰는 일꾼들이다.

얻어온 물건을 묵혀 두면 변질이 되기 때문에 그때그때 3, 40리 밖에 있는 일꾼들 집을 찾아가 두고 온다.

집을 비우고 일을 나가기 때문에 개들만 집을 지킨다.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개가 보는 앞에서 물건을 두고 와야 한다.

 

'아낌없이 나누기'의 행동지침이 요즘에 와서는 조금씩 그 빛이 바래져 가는 것 같다.

한 마디로 이런 일이 이제는 지겹게 느껴진다는 소리다.
그날 법회에 모인 여러 불자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은 보다 간소하고 단순하게 살려는 내 중노릇을 도와달라는 뜻에서였다. 

오늘부터 내 차에는 아무것도 싣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도 그런 뜻에서였다. 

 

공덕으로 따진다면, 어떤 한 사람에게 하는 보시나 공양보다는 여러 대중에게 하는 것이 훨씬 크다.

왜냐하면 대중공양이 곧 제불공양, 여러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대중의 한 사람으로 그중 한 몫을 받으면 된다.
올여름 일이 있어 길상사에 나갈 때는 내 손으로 가꾼 상추를 뜯어 가지고 간다.
혼자서는 자라 오르는 채소를 감당할 수도 없거니와 대중과 함께 공양하기 위해서다.

여럿이서 함께 먹고 있으면 혼자서 먹을 때보다 훨씬 더 맛이 있고 즐겁다. 

 

놓아두고 가기!
때가 되면, 삶의 종점인 섣달 그믐날이 되면,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것을 모두 놓아두고 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미리부터 이런 연습을 해 두면 떠나는 길이 훨씬 홀가분할 것이다.

 

* 법정스님산문집[아름다운 마무리]-문학의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