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

아름다운 마무리 - 법정

효림♡ 2010. 3. 12. 09:08

* 아름다운 마무리 - 법정스님

 

오늘 오후 채소밭을 정리했다.

고랭지에 서리가 내리기 전에 오이넝쿨과 고춧대와 아욱대 등을 걷어 냈다.

여름날 내 식탁에 먹을 것을 대 주고 가꾸는 재미를 베풀어 준 채소의 끝자락이 서리를 맞아 어둡게 시들어 가는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은 가꾸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그때그때 바로 그 자리에서 나 자신이 해야 할 도리와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긍정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과 모든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삶에 대해,

이 존재계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의 과정에서, 길의 도중에서 잃어버린 초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근원적인 물음,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는 것이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서 그때그때 마무리가 이루어진다. 그 물음은 본래 모습을 잃지 않는 중요한 자각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내려놓음은 일의 결과나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어 자신의 순수 존재에 이르는 내면의 연금술이다.

내려놓지 못할 때 마무리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윤회와 반복의 여지를 남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진정한 내려놓음에서 완성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채움만을 위해 달려온 생각을 버리고 비움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고 그 비움이 가져다주는 충만으로 자신을 채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의 본질인 놀이를 회복하는 것.

심각함과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고 천진과 순수로 돌아가 존재의 기쁨을 누린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안다.

과거나 미래의 어느 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순간임을 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 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인다.

 

또한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용서와 이해와 자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일깨운다.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자연과 대지, 태양과 강, 나무와 풀을 돌아보고 내 안의 자연을 되찾는다.

궁극적으로 내가 기댈 곳은 오직 자연뿐임을 아는 마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개체인 나를 뛰어넘어 전체와 만난다. 눈앞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나 자신이 세상의 한 부분이고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깨닫는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나를 얽어매고 있는 구속과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삶의 예속물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거듭난다.

진정한 자유인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마무리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그 향기와 맛과 빛깔을 조용히 음미한다.

그것은 삶에 새로운 향기와 빛을 부여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한다.

맑은 가난과 간소함으로 자신을 정신적 궁핍으로부터 바로 세우고 소유의 비좁은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또한 단순해지는 것. 하나만으로 만족할 줄 안다.

불필요한 것들과 거리를 둠으로써 자기 자신과 더욱 가까워진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분명하게 가릴 줄 안다.

문명이 만들어 낸 온갖 제품을 사용하면서 '어느 것이 진정으로 내 삶에 필요한가, 나는 이것들로 인해 진정으로 행복한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하여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살아온 날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고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것,

그리고 수많은 의존과 타성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홀로 서는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그 어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순례자나 여행자의 모습으로 산다.

우리 앞에 놓인 이 많은 우주의 선물도 그저 감사히 받아 쓸 뿐, 언제든 빈손으로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한다.

 

머지않아 늦가을 서릿바람에 저토록 무성한 나뭇잎들도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 빈 가지에 때가 오면 또다시 새잎이 돋아날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 법정산문집[아름다운 마무리]-문학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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