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산사의 아침 - 김기택

효림♡ 2010. 3. 29. 08:05

* 산사의 아침 - 김기택  

마리 새가 울자
공기 속에 숨어있던 새소리들 일제히 깨어나더니
하늘이 청자처럼 촘촘하게 금이 가더니
귓속이 유리조각으로 자글자글하더니 잠이 깨었다
날아오르려는 날갯짓을 간신히 가지에 붙들고 앉아
새들이 서로 낭랑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파닥거리며 날아오르려는 나뭇잎들을
땅에 단단히 붙박아놓은 나무들도
가지 속이 가려운지
조금씩 들썩거리고 있었다
공기는 햇살가닥을 길고 팽팽하게 늘이고 있어
새들이 조금만 튕겨도
새소리들은 크게 울리며 멀리 퍼져나갔다
아침 공기는 부력이 충만할 대로 충만해지고
새소리에 들려
내 몸도 저절로 떠오를 것 같았다 *

 

* 웃음에 바퀴가 달렸나 봐

한번 나오기 시작한 웃음이

멈추지 않아

웃음에서 깔깔 까르르르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나

바퀴 달린 웃음이

언덕을 내려가고 있어

웃음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

웃음 끄는 스위치가 있으면 좋겠어

달리는 웃음을 멈추게 하는

빨간 신호등도 있으면 좋겠어 *

 

* 벌레 2

끊임없이 몸을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벌레 한 마리 걸어간다
한껏 긴 몸을 늘였다가 움츠릴 때
몸 가운데가 봉긋하게 솟으면서
몸 아래에 둥근 공간이 생긴다
긴 몸으로 그 공간을 밀어
벌레는 앞으로 나아간다
가만히 벌레의 걸음을 들여다보니
흰 알을 까며 가는 것 같다
몸을 늘였다 줄였다 할 때마다
하나씩 뿜어져 나오는 그 알을
수많은 짧은 다리들이 굴리며 가는 것 같다 *

 

*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방금 딴 사과가 가득한 상자를 들고
사과들이 데굴데굴 굴러 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그녀는 서류뭉치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고층 빌딩 사무실 안에서
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빛깔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은 사과들을
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 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
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져서 떨어지는 웃음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사과를 나르던 발걸음을
발걸음에서 튀어오르는 공기를
공기에서 터져나오는 햇빛을
햇빛 과즙, 햇빛 향기를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 빌딩이 땅이라는 것을
뿌리처럼 발바닥이 숨쉬어온 흙이라는 것을
흙을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라는 것을

나 몰래 엿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웃음을
그녀의 내부에서 오랜 세월 홀로 자라다가
노래처럼 저절로 익어 흘러나온 웃음을

책상들 사이에서 안 보는 척 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걸음을
출렁거리며 하늘거리며 홀로 가는 걸음을
걷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가는 걸음을 *

*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The Solitsry Reaper]에서 인용

* 2004년 미당문학상 수상작

 

* 겨울새  

새 한 마리 똑바로 서서 잠들어 있다
겨울 바람 찬 허리를 찌르며 지나가는 고압선 위

잠속에서도 깨어 있는 다리의 균형
차고 뻣뻣하게 굳어지기 전까지는
저 다리는 결코 눕는 법이 없지

종일 날갯짓에 밀려가던 푸른 공기는

펴져나가 추위에 한껏 날을 세운 뒤

밤바람이 되어 고압선을 흔든다

새의 잠은 편안하게 흔들린다

나뭇가지 속에 잔잔하게 흐르던 수액의 떨림이

고압선을 잡은 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불꽃이 끓는 고압은 날개와 날개 사이      
균형을 이룬 중심에서 고요하고 맑은 잠이 된다
바람이 마음껏 드나드는 잠속에서 내려다보면
어둠과 바람은 울부짖는 한 마리 커다란 짐승일 뿐
그 위에서 하늘은 따뜻하고 환하고 넉넉하다
힘센 바람은 밤새도록 새를 흔들어대지만
푸른 공기는 어둠을 밀며 점점 커가고 있다

날개를 펴듯 끝없이 넓어지고 있다 *

 

* 소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웅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 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

 

* 소나무

솔잎도 처음에는 널따란 잎이었을 터

뾰쪽해지고 단단해져버린 지금의 모양은

잎을 여러 갈래로 가늘게 찢은 추위가 지나갔던 자국

파충류의 냉혈이 흘러갔던 핏줄 자국

 

추위에 빳빳하게 발기되었던 솔잎들

아무리 더워져도 늘어지는 법 없다

혀처럼 길게 늘어진 넓적한 여름 바람이

무수히 솔잎에 찔리고 긁혀 짙푸르러지고 서늘해진다

 

지금도 쩍쩍 갈라 터지는 껍질의 비늘을 움직이며

구불텅구불텅 허공으로 올라가고 있는 늙은 소나무

그 아래 어둡고 찬 땅 속에서

우글우글 뒤엉켜 기어가고 있는 수많은 뿌리들

 

갈라 터진 두꺼운 껍질 사이로는

투명하고 차가운 피, 송진이 흘러나와 있다

골 깊은 갈비뼈가 다 드러나도록 고행하는 고승의

몸 안에서 굳어져버린 정액처럼 단단하다 *

 

* 그루터기 
한때
그 연못은
커다란 분수였습니다.
땅 속에 스며든 물방울 하나가
거대한 물기둥으로 솟아올라
하늘을 덮고 큰 그늘을 거느리던 곳이었습니다.

지붕에
맺힌 물방울들은
떨어지고 맺히고 떨어지고 맺히고
꽃이 되었다가 잎이 되었다가 열매가 되었다가
후드득 떨어지면 차고 커다란 바람이 되기도 하였다가
다시 무수한 물방울로 되돌아가곤 하였습니다.

지금
분수가 있던 자리에는
키 작은 냄비 같은 연못이 하나 있습니다
땅속에서 이글거리는 뿌리의 불꽃을 받아
낮은 파문을 일으키며 끓고 있습니다.
솟아오르려고 하지만 작고 동그란 파문만 일어날 뿐입니다.

작은
연못에 엉덩이를 대고
한 노인이 걸터앉아 있습니다.
한때는 솟구치는 물줄기였지만, 불꽃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키도 작고 얌전하고 단단해서
오가다 지친 사람들은 누구나 앉아 쉬었다 가는 곳입니다. *

 

* 빗방울 길 산책 
비 온 뒤
빗방울 무늬가 무수히 찍혀 있는 산길을
느릿느릿 올라갔다
물빗자루가 한나절 깨끗이 쓸어놓은 길
발자국으로
비질한 자리가 흐트러질세라
조심조심 디뎌 걸었다
그래도 발바닥 밑에서는
빗방울 무늬들 부서지는 소리가
나직하게 새어나왔다
빗물을 양껏 저장한 나무들이
기둥마다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비 그친 뒤
더 푸르러지고 무성해진 잎사귀들 속에서
젖은 새 울음소리가
새로 돋아나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빗방울 길
돌아보니
눈길처럼 발자국이 따라오고 있었다 *

* 소가죽 구두 

비에 젖은 구두
뻑뻑하다 발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신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구두는 더 힘껏 가죽을 움츠린다
구두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은 없었다 
구두 주걱으로 구두의 아가리를 억지로 벌려
끝내 구두 안에 발을 집어넣고야 만다 
발이 주둥이를 틀어막자
구두는 벌어진 구두 주걱 자국을 천천히 오므린다

제 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소가죽은 축축하고 차가운 발을 힘주어 감싼다 *

* [시가 내게로 왔다 3]-마음산책

 

* 봄

바람 속에 아직도 차가운 발톱이 남아있는 3월.
양지쪽에 누워 있던 고양이가 네 발을 모두 땅에 대고
햇빛에 살짝 녹은 몸을 쭉 늘여 기지개를 한다.
한껏 앞으로 뻗은 앞다리.
앞다리를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뒷다리.
그 사이에서 활처럼 땅을 향해 가늘게 휘어지는 허리.
고양이 부드러운 등을 핥으며 순해지는 바람.
새순 돋는 가지를 활짝 벌리고
바람에 가파르게 휘어지며 우두둑 우두둑 늘어나는 나무들. 

김기택시집[껌]-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