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채호기 시 모음

효림♡ 2010. 5. 25. 08:08

* 감귤 - 채호기  

가지에 달린 노란 감귤
동그랗게 뭔가를 포옹하고 있는
오돌도돌한 감귤 껍질
누군가 껍질을 까면
시고 달착지근한 말랑말랑한 것

실핏줄이 도드라져 보이는 작은 심장
먹을 수 없어서 망설입니다
살아서 두근거리는 연약한 것
동그랗게 뭔가를 포옹하고 있는 것들
가지에 달린 노란 감귤 *

 * 채호기시집[수련]-문학과지성

 

* 키스

반딧불빛 어둠 속에 속삭이는 밤의 강
깊은 수심에서 떠오르는 공기 방울들
물결은 內衣 아래로만 구불거리고
당신 몸에 범람하는 강물
풀잎 끝에 반짝이는 은밀한 숨소리
입안에 가득 고이는 키스의 물 *

* 바다 2

바다에 와서야
바다가 나를 보고 있음을 알았다
하늘을 향해 열린 그
거대한 눈에 내 눈을 맞췄다
눈을 보면 그
속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바다는 읽을 수 없는
푸른 책이었다
쉼 없이 일렁이는
바다의 가슴에 엎드려
숨을 맞췄다
바다를 떠나고 나서야
눈이
바다를 향해 열린 창임을 알았다 *

 

* 편지  

맑은 물 아래 또렷한 조약돌들
당신이 보낸 편지의 글자들 같네
강물의 흐름에도 휩쓸려가지 않고
편안히 가라앉은 조약돌들
소근소근 속삭이듯 가지런한 평온함
그러나 그중 몇 개의 조약돌은
물 밖으로 솟아올라 흐름을 거스르네
세찬 리듬을 끊으며 내뱉는 글자 몇 개
그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겠죠
그토록 자제하려 애써도
어느새 평온함을 딛고 빠져나와
세찬 물살을 가르는 저 돌들이
당신 가슴에 억지로 가라앉혀둔 말이었겠죠
당신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심장 속에 두근거리는 *
* 채호기시집[손가락이 뜨겁다]-문학과지성사
 
* 붓꽃
간밤에 당신이 잠들었을 때 빗방울이
유리창에 내 사랑을 적어놓았지요
아침에 당신이 환하게 일어났을 때
창문은 당신을 반겨 보석처럼 떨며
사랑의 눈동자로 반짝였어요. 그러나
당신의 무심한 손은 관심도 없었지요
정원에 새로 핀 붓꽃을 보겠다고
유리창에 적힌 빗방울의 은밀한 서신을
얼룩인 양 말끔히 지우고 말았어요 *
 
* 수련
안개 낀 새벽에 수련의 저 흰 빛은 
수련이 아니다. 누가 공기의 흰 빛과 
수련의 흰 빛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 
부풀어오르며 대기를 가득 채우는 수련 
공기처럼 형태도 없이 구석구석 
끝도 없이 희게 빛나는 수련이여! 
   
안개 낀 새벽에 공기는 수련처럼 
희게 빛나다가 물처럼 푸른 두께로 
출렁인다. 수련은 창틀 없는 유리처럼 
푸른 깊이의 메아리. 물이 저 밑바닥의 
내면으로부터 물풀을 흔드는 물고기 
헤엄치는 혀로 푸드덕 말을 할 때 
솟아오르는 커다란 공기 구릉―수면을 깨뜨리는 
   
흰 포말 흰 파편은 수련 
물-말이 깨어져 날카롭게 빛나는 흰 수련! 
   
수련 주위의 보이지 않는 저 공기는 
수련의 생각들이다 
우리가 글자를 읽어나갈 때 
우리 주위에서 태어나는 생각의 파동들처럼

 
* 수련 2  

흰 주름치마 
오므린 치마 말기에서 서서히
육감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다시
치마단으로 가면서 약간 오므라드는
흰 치마


바람이 들추면 얼핏
감추인 속살이 들여다보이는
인조견 흰 속치마 갈래갈래 찢겨진 속치마


치마를 끄르면 
촘촘히 짠 융단 같은 꽃밥
화주(花柱)화사(花絲)화분낭 
수술, 암술, 꽃수염
씨방 
화피, 꽃물
꽃망울, 꽃방울
화탁, 꽃받기
화경, 꽃꼭지

 

* 별과 수련
밤하늘은 어두운 연못
젖은 별처럼 수련은
검은 수면에 불을 켠다
흰 빛
그것은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리는 수영 선수처럼
곧장 눈으로 뛰어든다
그 소란에 잠시 밝았던 눈이
다시 어두워진다. 술렁임도 멎고
다시 잠잠해진다
캄캄한 머리를 뒤적거리다
어디엔가 부딪치면
수련인가하고 얼른
눈을 뜬다

 

* 손가락이 뜨겁다

하늘의 별은 뜨겁다. 밤은 차갑다. 벌거벗은 네 등은 차갑다.내 손은 뜨겁다. 비가 오고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뿌연 수증기. 내 손가락들이 수증기에 갇힌다. 물렁물렁해진 진흙에 발이 빠지듯 네 등을 산책하는 손가락들이 빠져든다. 네 등에 손톱 끝으로 고랑을 내며 글씨를 쓴다. 씨앗을 뿌린다 

 

흙이 글자를 끌어당긴다. 네 등에 묻힌 글자에서 싹이 돋고, 들꽃들이 피어났다. 밤은 뜨겁다. 꽃은

뜨겁다. 꽃의 향기는 시가 되어 손가락 끝에 만져진다. 네 등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영원히 새겨졌다. 별은 뜨겁다. 손가락도 뜨겁다 *

* 채호기시집[손가락이 뜨겁다]-문학과지성사 

 
* 당신의 말
해진 옷자락 틈으로 만져지는 겨울 햇빛
당신의 체온만큼 따뜻하구나!
양말 속의 불 켜진 알전구처럼
기워야 할 찢어진 옷감 사이로
보이는 당신의 말!
나는 당신의 살갗을 쓰다듬듯 그 말을
애무하고, 그 말에 눈 맞춘다
햇빛을 빨아들여 어두운 그 자리 *

* 채호기시집[손가락이 뜨겁다]-문학과지성사

 

우리는 슬프다

우리는 슬프다. 술 취한 밤 하늘을 날아
나는 너에게로 간다. 가는 척한다
무선 전화 전파를 신고 공중을 저벅저벅 걸어간다
네가 나에게 "잘 지냈어?"하면
"사랑해"였는데, "별일 없어"하면서
서로의 가슴에 재를 뿌린다
그리고 서로 할퀸다. 좀더 깊이 상처를 내면서
상처가 아물기까지라도 기억해달라고
"가족을 버려!"라고 정색하지 않는다
삶을 버리랄까봐. 낮에는 각자 일한다
일로 얼굴을 가리고 낄낄댄다
밤에는 집에 가서 마누라와 애들 앞에
목소리를 깔고 그 위에 앉아 소리없이 말한다
술 취한 밤, 택시는 잡히지 않고
인적 없는 거리에서 비틀대다 제 그림자를 밟았을 때
그림자의 핏발선 눈초리에 가슴을 쥐어뜯겼을 때
우리는 각자 수화기를 들고 욕설을 주고받는다
제 탓할 힘이 없어질 때까지
고래고래 고함지른다. 축 늘어져 마른걸레처럼
싱겁게 빳빳해져 집으로 간다
그게 우리들 사랑이냐?
삶이냐? 고
골목 어둠 귀에는 들리지 않게 낮게 중얼거려본다
생각해보면 너는 내 그림자 속에만 사는데
니가 내 애인이냐?
검은 그림자가 개같이 어슬렁어슬렁 앞서간다

 

* 풀밭

멀리서 보면 그냥
한바탕의 초록인데
틈 없는 한 장의 바다인데
나는 그 속에서

연두색 회색 흰색 파랑색
노랑색, 천 갈래로 흩어지는 색색깔을 만난다
머리카락처럼 촘촘한
생명들에 둘러싸인다
나는 그 안에서
달리고 냄새 맡고 넘어지고
살 찢어지고 피 흘린다
멀리서 보면 그냥
한가로운 풀밭인데
풀들이 서로 뒤엉키고 꼬여
하얗게 말라 바스러져 간다 *

 

*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사랑의 피부에 미끄러지는 사랑의 말들처럼

수련꽃 무더기 사이로
수많은 물고기들이 비늘처럼 요동치는
수없이 미끄러지는 햇빛들

어떤 애절한 심정이
저렇듯 반짝이며 미끄러지기만 할까?  

영원히 만나지 않을 듯
물과 빛은 서로를 섞지 않는데,  
푸른 물위에 수련은 섬광처럼 희다 *

 

* 돌의 메아리-마이산

그녀는 각 지고 둥그스름한 돌

앞에 선다. 그녀가 비치지 않는 돌

입 다물고 돌아서서 대화를 거부하는 돌

을 그녀는 바라본다, 돌

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까맣고 노랗고 희고 푸른 모래들은 얼마나

긴 세월과 수많은 비바람을 압축하여

저 거대한 말의 덩어리가 되었나

반짝이다 사라지고 흐려지다 나타나는

먼지들, 입김들은 허공중에 떠도는 얼마나

강한 사랑의 접착력과 서로 교배하는 음절들의 악력으로

하나의 우뚝 선 음악이 되었나

구름처럼 시시각각 모이고 흩어지는 우연의 형상

 

거무튀튀하고 단단한 쪼개질 수 없는 차갑게 식은

별이면서 그 속에 한숨과 동굴과 오솔길과 생각과

미로와 감촉과 계곡과 우주의 감정을 감추고 있는

결빙된 태양의 재, 그녀 앞에 그녀가 비치지 않는 돌

 

돌 앞에 서기 전에 그녀는 숲의

오솔길에서 벗어나 나뭇가지와

가시덤불의 액자에 담긴 물에

도착했다. 파르스름한 영상들로 말을

건네는 물. 소리를 침몰시킨 풍경은

고요가 수정으로 굳은, 거울에 비쳤다

투영된 영상들의 긴장이 부드러운 물을

순식간에 투명한 금강석으로 만드는

단어들을 고정시키는 문장 속 의미의 근육들

처럼 숲 속의 그 거울을 장식하는 낙엽들을

밟고 그녀가 물가에 섰을 때, 갑자기 물에

낯선 것이 솟아나고, 문장에 파문을 일으킨

말은 벌써 그녀 안에 어룽거렸다. 거울에 비친 건

그녀가 아닌 말의 영상이어서 매혹적으로 울렸다

말을 끄집어내기 위해 그녀의 하얀 손이

거울을 깨뜨리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에 젖은 하얀 손이 돌 

을 깎았다, 손이 물을 

잡을 때까지. 돌 부스러기들 

이 하얀 손에 얼룩졌다, 돌을 

읽을 수 있는 문장이 묻어날 

물에 젖은 하얀 손이 돌의 문장을 

닦았다, 그녀가 비칠 때까지 문질

렀다, 돌이 그녀를 읽고, 그녀가 

돌에 비칠 수 있도록

 

그러나 하얀 손이 물에 닿을 때 거울은 깨지고

영상은 흩어지고, 그림이 사라졌듯이, 불투명한

돌은 얇아져 반들반들한 거울이 되지 않고

흐물흐물해져 수평의 물이 되지 않고

흩어져버렸다. 바람의 거대한 공허를 남기고

 

그녀가 읽는 단어들이 나무로 우뚝하고

그녀가 읽는 문장들이 이끼로 미끄러운

그녀를 유혹하는 숲의 오솔길을 걷다가

그녀는 길을 가로막고 선 돌을 만났다

각 지고 둥그스름한 돌, 그녀는 돌을

펼쳤다, 문장 안에 그녀가 어룽거리며

비쳤다. 그녀 안에서 돌이 매혹적인 목소리로 울렸다

 

숲 속의 밝은 햇빛이 눈동자에 머물렀다

그녀가 물가에 섰을 때, 물에 비친 건

돌의 메아리, 검은 글자들이었다 

 

* 너의 입술 

입술은 술의 입. 입을 가진 액체는 술밖에 없다. 술은 빨아들인다. 술 마시는 사람은 술 안으로 사라지고 만다.

몸 안으로 들어간 술은 모두 몸 밖으로 입만 내민다. 붉은 입술로 치장하고 있는 취한 사람의 몸 *

 

* 채호기시인

-1957년 대구 출생

-1988년 [창작과비평] 등단,  2002년 김수영문학상, 2007년 현대시작품상 수상

-시집 [수련][손가락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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