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자전거 시 모음

효림♡ 2010. 6. 7. 08:25

낡은 자전거 - 안도현

너무 오랫동안 타고 다녀서
핸들이며 몸체며 페달이 온통 녹슨 내 자전거
혼자 힘으로는 땅에 버티고 설 수가 없어
담벽에 기대어 서 있구나
얼마나 많은 길을 바퀴에 감고 다녔느냐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많이 알수록
삶은 여위어가는 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자전거야
자전거야
왼쪽과 오른쪽으로 세상을 나누며
명쾌하게 달리던 시절을 원망만 해서 쓰겠느냐
왼쪽과 오른쪽 균형을 잘 잡았기에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이만큼이라도, 왔다 *

 

*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 안도현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나 자전거가 되리
한편생 왼쪽과 오른쪽 어느 한쪽으로 기우뚱거리지 않고
말랑말랑한 맨발로 땅을 만져보리
구부러진 길은 반듯하게 펴고, 반듯한 길은 구부리기도 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모퉁이, 움푹 파인 구덩이, 모난 돌멩이들
내 두 바퀴에 감아 기억하리
가위가 광목천 가르듯이 바람을 가르겠지만
바람을 찢어발기진 않으리
나 어느날은 구름이 머문 곳의 주소를 물으러 가고
또 어느날은 잃어버린 달의 반지를 찾으러 가기도 하리
페달을 밟는 발바닥은 촉촉해지고 발목은 굵어지고
종아리는 딴딴해지리
게을러지고 싶으면 체인을 몰래 스르르 풀고
페달을 헛돌게도 하리
굴러가는 시간보다 담벼락에 어깨를 기대고
바퀴살로 햇살이나 하릴없이 돌리는 날이 많을수록 좋으리
그러다가 천천히 언덕 위 옛 애인의 집도 찾아가리
언덕이 가팔라 삼십년이 더 걸렸다고 농을 쳐도 그녀는 웃으리
돌아가는 내리막길에서는 뒷짐 지고 휘파람을 휘휘 불리
죽어도 사랑했었다는 말은 하지 않으리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

 

* 고전적인 자전거 타기 - 복효근

넘어져보라 수도 없이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르팍에 상채기를 새기며
제대로 넘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하리라
요즘처럼 아주 작은 어린이용 자전거 말고
페달에 발끝이 닿지도 않는
아버지의 삼천리호 자전거를 훔쳐 타고서
오른쪽으로 넘어질 것 같으면 더욱 오른쪽으로 핸들을 기울여보라
왼쪽으로 넘어질 것 같으면 왼쪽으로 핸들을 더욱 기울여보라
그렇다고 어떻게야 되겠느냐
왼쪽 아니면 오른쪽밖에 없는 이 곤두박질 나라에서
수도 없이 넘어져보라
넘어지는 쪽으로 오히려 핸들을 기울여야 하는 이치를
자전거를 배우다보면 알게 되리라
넘어짐으로 익힌 균형감각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아비들을 이해할 날도 있으리라
그러던 어느 날에사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아슬아슬한 균형으로
네가 아비가 되어 있으리라 *  

 

* 노란 자전거 - 최마루

자전거 바퀴의 타이어는 질긴 생명 같은 뱃가죽이다

체인은 어떠한 고난에도 이길 쇠심줄이고

손잡이는 황소대가리이다

 

페달은 비 오는 날의 우산 같은 희망을 밟아가고
나는 짐짝처럼 구겨진 마음의 병들을 고치러 화사한 병원에 간다

나비 고추잠자리 쨍쨍한 여름 그리고 물 수제비
아름다운 수채화에 박혀버린 투영된 추억
그리고
신나게 달려가는 바퀴의 잔잔한 노래

나를 나에게 행복하게 팔던 날!
추억 안으로 스며드는 노란 그림
어느새
하늘의 융단을 날은다 *

 

* 아버지의 자전거 - 박운초 

마음 한쪽

아픔의 지도를 그렸던

기억이 있네

 

밤보다 더 어두웠던

슬픈 융단 같은 새벽

세상을 등진 내 아버지 

 

어느 해부터

주인을 잃고 우는

아버지의 낡은 자전거

 

“어디로 가야 하니?”

내게 물어 와도

대답 할 수 없네

 

겨울이 오기 전

아버지의 사랑

너에게 넘겨주리라 *

 

* 자전거 도둑 - 신현정

봄밤이 무르익다 
누군가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다 
자전거를 슬쩍 타보고 싶은 거다 
복사꽃과 달빛을 누비며 달리고 싶은 거다 
자전거에 냉큼 올라가서는 핸들을 모으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은빛 폐달을 신나게 밟아보는 거다 
꽃나무를 사이사이 빠지며 
달 모퉁이에서 핸들을 냅다 꺾기도 하면서 
그리고 불현듯 급정거도 해보는 거다 
공회전하다 
자전거에 올라탄 채 공회전하다 
뒷바퀴에 복사꽃 하르르 날리며 
달빛 자르르 깔려들며 
자르르 하르르 *

 

* 잠자는 자전거 - 박정원

그가 지나온 길들이 나무에 기대어 있다

왼쪽은 위로 오른쪽은 아래로 향한

페달 밟으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그

힘을 받쳐주던 체인도 털털거리며 달리던 바퀴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혼자 힘으론 결코 나아갈 수 없는 페달처럼

낭떠러지 직전에 멈춰버린 브레이크처럼

위태로운 발자국들 그림자들

수많은 정차, 왼발 오른발 무릎을 꺾었던 경계선 끝에

룰룰랄라 달리던 시간들도 얼기설기 비친다

그가 부린 짐들도 비켜서있다

어깨를 내어준 나무가
오르내리던 길에서 만난 응달까지도 불러와

고요히 토닥이고 있다
저러고 싶을 때가 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누군가에게 기대어
깨워도 일어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기지개를 켜고 스스로 걸어 나갈 때까지
마냥 지켜보고 싶은 풍경을 영원히
덧칠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 사랑의 편지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7 - 유하 
어둔 밤, 페달을 돌려
자전거 전등을 밝히고
사랑의 편지를 읽는 사람아
그 간절함의 향기가 온 땅에 가득하기를


사랑은 늘 고통을 페달 돌려
자기를 불 밝힌다
자전거의 길을 따라 어떤 이는 와서
그 빛으로 인생을 읽고 가기도 하고
구원을 읽고 가기도 한다


그대, 부디 자전거가 가는 길로
사랑의 편지를 부쳐다오
세상의 유전이 다하고 암흑이 온다 해도
빛을 구할 데는 마음밖에 없나니
나는 나를 불 밝혀 그대 편지를 읽으리라 *
 

 

* 두 사람 - 곽재구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꽃길을 지나갑니다
바큇살에 걸린 꽃향기들이 길 위에 떨어져 반짝입니다.

나 그들을 가만히 불러 세웠습니다
내가 아는 하늘의 길 하나
그들에게 일러주고 싶었습니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불러놓고 그들의 눈빛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는 길보다 더 아름다운 길을

그들이 알고 있을 것만 같아서
불러서 세워놓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

 

* 추억의 삼천리 자전거포 - 주용일 
면 소재지 중학교를 통학하며 바람 빠진 자전거 타이어에

바람을 넣거나 체인에 기름을 얻어 치던 곳 

중학교 못 간 석이는 그곳에서 세수대야에 주부를 담그고

빵꾸를 때웠다, 기계충의 석이 머리 위로 신작로 지나가던

삼륜차가 하얀 먼지를 씌워놓고 사라지던 곳 

석이에게 미안해 금빛으로 빛나는 중학모자를 벗고 까까머리로 지나던 곳 

몇 대의 중고 자전거가 늘어서 있고 기름때 묻은 헝겊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던 곳 

장날 석이와 함께 주먹만 한 찐빵을 몰래 훔쳐 먹던 시장 옆 

이제는 석이가 주인이 되어 지나는 나를 불러 세워 텅 빈 위장에

막걸리 바람을 빵빵하게 넣어주는, 추억의 삼천리 자전거포 *
* 주용일시집 [문자들의 다비식은 따듯하다]-문학과경계사

 

* 자전거 타는 사람 - 김기택

   -김훈의 자전거를 위하여-

당신의 다리는 둥글게 굴러간다

허리에서 엉덩이로 무릎으로 발로 페달로 바퀴로

길게 이어진 다리가 굴러간다

당신이 힘껏 페달을 밟을 때마다 

넓적다리와 장딴지에 바퀴 무늬 같은 근육이 돋는다

장단지의 굵은 핏줄이 바퀴 속으로 들어간다

근육은 바퀴 표면에도 울퉁불퉁 돋아 있다

자전거가 지나간 길 위에 근육무늬가 찍힌다

둥근 바퀴의 발바닥이 흙과 돌을 밟을 때마다

당신은 온몸이  심하게 흔들린다

비포장도로처럼 울퉁불퉁한 바람이

당신의 머리칼을 마구 흔들어 헝클어뜨린다

무수한 땀구멍들이 벌어졌다 오므라들며 숨쉬는 연료

뜨거워지는 연료 땀 솟구치는 연료

그래서 진한 땀 냄새가 확 풍기는 연료

당신의 2기통 콧구멍으로 내뿜는 무공해 배기가스는

금방 맑은 바람이 되어 흩어진다

달달달달 굴러가는 둥근 다리 둥근 발

둥근 속도 위에서 피스톤처럼 힘차게 들썩거리는

둥근 두 엉덩이와 둥근 대가리

그 사이에서 더 가파르게 휘러지는 당신의 등뼈 *

* 김기택시집[소]-문학과지성사

 

* 자전거를 배우는 아버지 - 박후기 

파밭에 고꾸라진 아버지가

파꽃처럼 짧게 쳐올린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자전거와 함께 일어서는 저녁이었다

 

어린 내가

허리 부러진 대파와 함께

밭고랑에 드러누워

하얗게 웃던 밤중이었다

 

식구들이 깔깔거리며

대문 밖을 내다볼 때,

입 벌린 대문 깊숙한 곳에 매달린 알전구가

목젖처럼 흔들렸다

 

아버지!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지 마세요

아버지를 태운 자전거처럼,

한쪽으로 기운 살림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환한 파밭의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늘 같은 자리만 맴도는구나,

벗겨진 체인을 끼우고

손으로 페달을 돌리며 아버지가 말했다

 

어머니는 허리 부러진 파를

뒤란에 옮겨 심었다

흙 속에 뿌리만 묻은 채

옆으로 누워 잠자는 대파들처럼,

식구들은 옹기종기

한 이불 속에서 대파 같은 다리를 묻고

잠이 들었다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자전거를 배우지 못했다

자식들은 아버지보다 많이 배웠지만

아버지보다 많은 것을 알진 못했다

* 박후기시집[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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