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박몽구 시 모음

효림♡ 2010. 6. 14. 08:21
* 정취암에 가서 4 - 박몽구  

편편한 아스팔트 길 버렸을 때

비로소 겨울 억새에 가려진

암자로 가는 길 드러났다

해발 오백 미터 바위 위에 앉은

산사로 닿는 지름길이

산등성이에 뱀처럼 걸려있지만

주지 수완 스님은 빠른 길을 버리고

세 배나 먼 길로 돌아오라고 한다

 

산사의 불빛은 먼 별처럼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산짐승들의 반가운 울음이 들리고서야

절 마당으로 닿는 한 가닥 길이

부끄러운 속살처럼 보일 듯 말듯 드러났다

 

지름길 놔두고 굽이굽이 먼데로 에둘러

산사로 닿는 길 닦은 사정을 헤아리기 어렵다가

새벽 예불 때에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미명의 어둠 속에서

지천명 맞은 나는

당장 눈앞에 희망의 꾸러미 내놓으라는

비원 앞에 난감해 하는 부처의 모습이

안쓰럽게 촛불 너머에 어려보였다

새벽 산바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일으켰다 * 

 

* 정취암에 가서 5  

새벽 공기를 잘 다린 무명 가르듯 흠집 없이 깨뜨리는 도량석 목탁 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졌습니다. 객사 아랫목에서 누르스럼한 호박이 제 맛을 들이는 소리

법당에 올릴 무말랭이 허리 뒤트는 모양새가 왜 이리 살붙이 같을까요

새벽 예불 때 백팔배 절반 못 가 허리 무릎 펼수 없을 즈음에야

내 마음에 큰 빗장이 걸렸는지 들여다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둔철산 봉우리 너머 떠오르는 해의 뺨이 막 붓질을 마친 빨강의

댓돌 위 흰 고무신에 고인 가을 겨울 빛이 유난히 반질거렸습니다

그날 밤에는 구상나무 숲에 웅크린 채 우는 살쾡이 울음이 더없이 정겹게 들렸습니다

몇 년쯤 그리운 얼굴 잊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스님, 차 한잔 마시고 가란 말밖에 달리 말씀 없으신 스님

둔철산을 넘어 내 속까지 비추는 해는 산문 밖에서도 똑같이 뜰까요 *  

 

* 선운사 상사화  

온 뿌리의 힘 모아
봄물을 만인루의 하늘로 올리기로
저 푸른 빛 다 갚겠다는 뜻 아니다
내 피와 살 아낌없이 녹여
동백숲 푸르름 부끄럽잖게
청청한 잎 올곧게 피워 냄은
그대의 봄밤 하얗게 밝힐 뜻 아니다
불면 꺼질 듯 글썽이는 이슬과
멀리 보는 눈 가진 별빛 합방시켜
세상의 어느 꽃 견줄 수 없는
향기를 지닌 꽃 피워올리는 것은
어제와 똑같은 새벽 맞겠다는 뜻 아니다
이제껏 쌓은 살 다 비움으로
완강하게 매인 밧줄의 미련 버림으로
그대 무성한 가시뿐인 가슴에 안겨도
하나도 아프지 않은 포옹! *

* 박몽구시집[마음의 귀-시에 詩]-시와에세이

 

* 마음의 귀  

파르스름하게 타는 진공관 불빛을 보며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를 듣는다
지천명을 턱걸이하면서
어두워진 눈이 책을 자꾸 밀어낸다
빈약한 진공관 소리를 더 모으느라
귀바퀴 말끔하게 닦으면서
문득 말년이 되어 사랑하는 이 보내고
어두워진 귀로 일궈낸
첼로의 선율 더욱 살가운 건 왜일까
다발성 경화증 딛고 일어선 뒤프레가
다리 놓은 베토벤의 선율 위에
문득 단풍나무 한 그루 놓여 있다
저렇듯 척박한 땅에서 무엇이 자랄까
방관자들의 어설픈 걱정을 딛고
한 군데도 빠짐없이 핏빛 뿜어올린
단풍나무 한 그루
때 묻지 않은 저녁 놀 흩뿌린다
어두워진 귀 넘어 막힌 핏줄 넘어
맑고 깊은 영혼 눈 뜬다 *

* 박몽구시집[마음의 귀-시에 詩]-시와에세이

 

* 빈 잔  

너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시간은 기린 목보다 길다

문 밖으로 돌려진 내 마음은

술이다

벌겋게 타고 있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

돌밭뿐인데도

기꺼이 뿌리를 내려

이쁜 꽃이 된 사람아

오늘은 왜 이리 늦는지

너를 기다리고 있자면

나는 다 비어서

빈 잔이 된다

채워지기를 기다리며

저물도록 말라가고 있다 *

 

* 그림 같은 하나

라일락 향기 독한 술기운처럼 번져 있는

대낮 금남로에 서 보아라

그리운 얼굴들 보이지 않고

유리보다 더 반짝이는 엉덩이를 들어 앉힌

차들의 엉금거리는 모양새라니

이 땅의 춥고 긴 겨울을 단숨에 풀던

누이의 머리채 같은

라일락 보드라운 향기를 마시고도

숨 막히는 공기만 토해 내다니

 

연분홍 펄럭이는 고개뿐인 봄꽃이

발톱 세운 황소바람을 거뜬히 이길 수 있었던 건

무등 아래 너릿재에서 타는 극락강까지

애 업은 아낙에서 쇠 치는 벗까지

그림같이 하나 되어

눈을 떼어낸 총 앞에 섰던

덕분 아니었을까 

쇳덩이도 변하여 따스한 포옹이 되던

그 용솟음치는 그리움에 기대어서가 아니었을까

 

오늘 다시 라일락 향기 몰아치건만

망각의 늪에 아득하게 적셔져

손을 놓은 사람들을 보아라

일도 하지 않은 채

나온 찬밥 한 그릇을 놓고도

벗들은 뿔뿔이 갈라지고

산을 넘어 죽음의 바다를 건너

혹독한 겨울을 막내리게 하던

라일락 향기를 다 삼키고

앞길 가리지 못하게

구린내만 풍기는 사람들을 보아라

 

* 겨울 비
열병 든 여자의 입술처럼 바싹 마른
하늘 금가며 쏟아지는 겨울 비
진종일 속으로 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잿빛 하늘 견디고 있는 눈썹천정
안에 숨은 상처는 저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저는 한 방울 남김 없이 부서지지만
도란도란 가난한 창을 덥히는 램프빛 *

* 박몽구시집[봉긋하게 부푼 빵]-시와문화사 

 
* 내장산 단풍길에  

내장산 단풍나무에 불이 붙어

온 능선에 어느 붓도 흉내내지 못할

수채화 한 폭을 이뤄놓았네

그리운 사람아

비탈에 선 나무들이

바람 쌀쌀해질수록 울긋불긋 색감을 더하는 것

고개 고개 넘어 천리에서도 훤히 보이는가

비바람 몰아쳐도 가릴 것 없는 내 사람아

알지 못할 힘만 몰려다니는 교실에

누구나 가슴속 말 꺼내놓을 수 있도록

나팔 하나 걸다가

거리에 선 벗이여

너 비록 빈털터리 벌거숭이여도

모두 제 앞만 챙기고 가는 길에

좋은 데는 남한테 다 내주고

상처만 남은 네가 그린 한 폭의 그림

이 세상의 회폐로는 살 수 없는

내장산 단풍을 옮겨왔구나

저를 다 닦아 반짝이는 보석이구나 

* 박몽구시집[마음의 귀-시에 詩]-시와에세이

 

* 삽교역 풍경

장항 포구 갯내음 실어다 줄

상행선 열차를 기다리며

이태리 포플러의 목이 한껏 뽑아져 있다

달궈진 철길을 식히려고 몰려든 마파람과

푸성귀 몇 가지를 벌여놓은 채

길손을 맞는 아낙의 황톳빛 손

커피 잔에 흘러간 노래를 듬뿍 담아주는 다방

대폿집 앞 자전거 바퀴 따라 빙빙 도는 가을 하늘.....

낡은 이발소 그림 같은 풍경

지친 길손의 등에 흰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물구나무서서 볼 때

비로소 분장을 지운 세상의 맨얼굴 들어난다 *

* 박몽구시집[봉긋하게 부푼 빵]-시와문화사

 

* 박몽구시인

-1956년 전남 송정 
-1977 [대화] 시 [영산강]발표, 2005년 한국출판평론상 수상
-시집 [우리가 우리에게 묻는다] [십자가의 꿈] [끝내 물러서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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