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겨울 억새에 가려진
암자로 가는 길 드러났다
해발 오백 미터 바위 위에 앉은
산사로 닿는 지름길이
산등성이에 뱀처럼 걸려있지만
주지 수완 스님은 빠른 길을 버리고
세 배나 먼 길로 돌아오라고 한다
산사의 불빛은 먼 별처럼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산짐승들의 반가운 울음이 들리고서야
절 마당으로 닿는 한 가닥 길이
부끄러운 속살처럼 보일 듯 말듯 드러났다
지름길 놔두고 굽이굽이 먼데로 에둘러
산사로 닿는 길 닦은 사정을 헤아리기 어렵다가
새벽 예불 때에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미명의 어둠 속에서
지천명 맞은 나는
당장 눈앞에 희망의 꾸러미 내놓으라는
비원 앞에 난감해 하는 부처의 모습이
안쓰럽게 촛불 너머에 어려보였다
새벽 산바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일으켰다 *
* 정취암에 가서 5
새벽 공기를 잘 다린 무명 가르듯 흠집 없이 깨뜨리는 도량석 목탁 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졌습니다. 객사 아랫목에서 누르스럼한 호박이 제 맛을 들이는 소리
법당에 올릴 무말랭이 허리 뒤트는 모양새가 왜 이리 살붙이 같을까요
새벽 예불 때 백팔배 절반 못 가 허리 무릎 펼수 없을 즈음에야
내 마음에 큰 빗장이 걸렸는지 들여다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둔철산 봉우리 너머 떠오르는 해의 뺨이 막 붓질을 마친 빨강의
댓돌 위 흰 고무신에 고인 가을 겨울 빛이 유난히 반질거렸습니다
그날 밤에는 구상나무 숲에 웅크린 채 우는 살쾡이 울음이 더없이 정겹게 들렸습니다
몇 년쯤 그리운 얼굴 잊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스님, 차 한잔 마시고 가란 말밖에 달리 말씀 없으신 스님
둔철산을 넘어 내 속까지 비추는 해는 산문 밖에서도 똑같이 뜰까요 *
* 선운사 상사화
온 뿌리의 힘 모아
봄물을 만인루의 하늘로 올리기로
저 푸른 빛 다 갚겠다는 뜻 아니다
내 피와 살 아낌없이 녹여
동백숲 푸르름 부끄럽잖게
청청한 잎 올곧게 피워 냄은
그대의 봄밤 하얗게 밝힐 뜻 아니다
불면 꺼질 듯 글썽이는 이슬과
멀리 보는 눈 가진 별빛 합방시켜
세상의 어느 꽃 견줄 수 없는
향기를 지닌 꽃 피워올리는 것은
어제와 똑같은 새벽 맞겠다는 뜻 아니다
이제껏 쌓은 살 다 비움으로
완강하게 매인 밧줄의 미련 버림으로
그대 무성한 가시뿐인 가슴에 안겨도
하나도 아프지 않은 포옹! *
* 박몽구시집[마음의 귀-시에 詩]-시와에세이
* 마음의 귀
파르스름하게 타는 진공관 불빛을 보며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를 듣는다
지천명을 턱걸이하면서
어두워진 눈이 책을 자꾸 밀어낸다
빈약한 진공관 소리를 더 모으느라
귀바퀴 말끔하게 닦으면서
문득 말년이 되어 사랑하는 이 보내고
어두워진 귀로 일궈낸
첼로의 선율 더욱 살가운 건 왜일까
다발성 경화증 딛고 일어선 뒤프레가
다리 놓은 베토벤의 선율 위에
문득 단풍나무 한 그루 놓여 있다
저렇듯 척박한 땅에서 무엇이 자랄까
방관자들의 어설픈 걱정을 딛고
한 군데도 빠짐없이 핏빛 뿜어올린
단풍나무 한 그루
때 묻지 않은 저녁 놀 흩뿌린다
어두워진 귀 넘어 막힌 핏줄 넘어
맑고 깊은 영혼 눈 뜬다 *
* 박몽구시집[마음의 귀-시에 詩]-시와에세이
* 빈 잔
너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시간은 기린 목보다 길다
문 밖으로 돌려진 내 마음은
술이다
벌겋게 타고 있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
돌밭뿐인데도
기꺼이 뿌리를 내려
이쁜 꽃이 된 사람아
오늘은 왜 이리 늦는지
너를 기다리고 있자면
나는 다 비어서
빈 잔이 된다
채워지기를 기다리며
저물도록 말라가고 있다 *
* 그림 같은 하나
라일락 향기 독한 술기운처럼 번져 있는
대낮 금남로에 서 보아라
그리운 얼굴들 보이지 않고
유리보다 더 반짝이는 엉덩이를 들어 앉힌
차들의 엉금거리는 모양새라니
이 땅의 춥고 긴 겨울을 단숨에 풀던
누이의 머리채 같은
라일락 보드라운 향기를 마시고도
숨 막히는 공기만 토해 내다니
연분홍 펄럭이는 고개뿐인 봄꽃이
발톱 세운 황소바람을 거뜬히 이길 수 있었던 건
무등 아래 너릿재에서 타는 극락강까지
애 업은 아낙에서 쇠 치는 벗까지
그림같이 하나 되어
눈을 떼어낸 총 앞에 섰던
덕분 아니었을까
쇳덩이도 변하여 따스한 포옹이 되던
그 용솟음치는 그리움에 기대어서가 아니었을까
오늘 다시 라일락 향기 몰아치건만
망각의 늪에 아득하게 적셔져
손을 놓은 사람들을 보아라
일도 하지 않은 채
나온 찬밥 한 그릇을 놓고도
벗들은 뿔뿔이 갈라지고
산을 넘어 죽음의 바다를 건너
혹독한 겨울을 막내리게 하던
라일락 향기를 다 삼키고
앞길 가리지 못하게
구린내만 풍기는 사람들을 보아라
* 겨울 비
열병 든 여자의 입술처럼 바싹 마른
하늘 금가며 쏟아지는 겨울 비
진종일 속으로 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잿빛 하늘 견디고 있는 눈썹천정
안에 숨은 상처는 저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저는 한 방울 남김 없이 부서지지만
도란도란 가난한 창을 덥히는 램프빛 *
* 박몽구시집[봉긋하게 부푼 빵]-시와문화사
내장산 단풍나무에 불이 붙어
온 능선에 어느 붓도 흉내내지 못할
수채화 한 폭을 이뤄놓았네
그리운 사람아
비탈에 선 나무들이
바람 쌀쌀해질수록 울긋불긋 색감을 더하는 것
고개 고개 넘어 천리에서도 훤히 보이는가
비바람 몰아쳐도 가릴 것 없는 내 사람아
알지 못할 힘만 몰려다니는 교실에
누구나 가슴속 말 꺼내놓을 수 있도록
나팔 하나 걸다가
거리에 선 벗이여
너 비록 빈털터리 벌거숭이여도
모두 제 앞만 챙기고 가는 길에
좋은 데는 남한테 다 내주고
상처만 남은 네가 그린 한 폭의 그림
이 세상의 회폐로는 살 수 없는
내장산 단풍을 옮겨왔구나
저를 다 닦아 반짝이는 보석이구나
* 박몽구시집[마음의 귀-시에 詩]-시와에세이
* 삽교역 풍경
장항 포구 갯내음 실어다 줄
상행선 열차를 기다리며
이태리 포플러의 목이 한껏 뽑아져 있다
달궈진 철길을 식히려고 몰려든 마파람과
푸성귀 몇 가지를 벌여놓은 채
길손을 맞는 아낙의 황톳빛 손
커피 잔에 흘러간 노래를 듬뿍 담아주는 다방
대폿집 앞 자전거 바퀴 따라 빙빙 도는 가을 하늘.....
낡은 이발소 그림 같은 풍경이
지친 길손의 등에 흰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물구나무서서 볼 때
비로소 분장을 지운 세상의 맨얼굴 들어난다 *
* 박몽구시집[봉긋하게 부푼 빵]-시와문화사
* 박몽구시인
-1956년 전남 송정
-1977 [대화] 시 [영산강]발표, 2005년 한국출판평론상 수상
-시집 [우리가 우리에게 묻는다] [십자가의 꿈] [끝내 물러서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