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이건청 시 모음

효림♡ 2010. 6. 25. 08:12

* 쇠똥구리의 생각 - 이건청    

쇠똥구리가 쇠똥을 굴리고 가다가 잠시 멈춘다.

지금 내가 거꾸로 서서 뒷발로 굴리고 가는 저것은 풀밭이다.  

이슬에 젖은 새벽 풀밭 위로 흐린 새 몇 마리 떠갔던가. 

그 풀밭 지나 종일 가면 저물녘 노을에 물든 이포나루에 닿을까.  

거기 묶인 배 풀어 타고 밤새도록 흐르면 이 짐 벗은 채,

해 뜨는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  

* 이건청시집[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서정시학

 

* 좁은 자리

후투티 한 마리

내 속으로 날아와

추운 냉이 이파리만큼

푸르스름한 소리로 울고 있다 *

 

* 네가 올 때까지 
밤 깊고
안개 짙은 날엔
내가 등대가 되마 

넘어져 피나면
안 되지
안개 속에 키 세우고
암초 위에 서마 

네가 올 때까지
밤새 
무적(霧笛)을 울리는
등대가 되마
 

 

* 폐광촌을 지나며 

   고한읍 어딘가에 고래가 산다는 걸 나는 몰랐다. 까아맣게 몰랐다. '사북사태' 때도 그냥 어용노조만 거기 있는 줄 알았다.  

혹등고래가 산 속에 숨어 탄맥을 쌓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냥 막장인 줄만 알았다.

푸슬푸슬 내리는 눈발이 아이들도 개도 지우고, 유리창도 깨진 사택들만 남아 있는 줄 알았다. 고래가 사는 줄은 몰랐다.

역전 주점, 시뻘겋게 타오르는 조개탄 난로의 그것을 불인 줄만 알았다.

카지노 아랫마을 찌그러진 주점에서 소주잔을 들어올리는 사람들의 한숨인 줄만 알았다.

검은 탄더미인 줄만 알았다. 그냥 석탄인 줄만 알았다. *

 

*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한때, 나는 소금창고에 쌓인 흰 소금 속에 푹 묻히고 싶은 때가 있었다 

소금 속에 묻혀 피도 살도 다 내어주고 몇 마디 가벼운 말로 떠오르고 싶은 때가 있었다
마지막엔 '또르르 또르르' 목을 울리는, 한 마리 노고지리 되어 푸른 보리밭 쪽으로 날아가고 싶은 때가 있었다 *

* 이건청시집[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서정시학  

 

* 무서운 풀 

토굴에서 발각된 패잔병의 허벅지에 흰 벌레들이 기어다녔다. 집에 가고 싶어요, 검푸른 얼굴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가 완장을 찬 사람들의 들것에 실려 갔다. 멀찍이 아이들이 따라갔다. 나는 혼자 남아 뭉게구름 속 매미소리를 들었다

매미 소리에 섞여 총소리가 울렸다. 산굽이였다

사람들이 죽은 그를 벌레와 함께 묻었다. 땅도 파지 않은 채 그냥 흙으로 덮었다. 학교길 옆이었다

 

* 멸치 

내가 멸치였을 때
바다 속 다시마 숲을 스쳐 다니며
멸치 떼로 사는 것이 좋았다
멸치 옆에 멸치, 그 옆에 또 멸치
세상은 멸치로 이룬 우주였다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며
붉은 산호, 치밀한 뿌리 속을 스미는
바다 속 노을을 보는 게 좋았었다

 

내가 멸치였을 땐
은빛 비늘이 시리게 빛났었다
파르르 꼬리를 치며
날쌔게 달리곤 하였다
싱싱한 날들의 어느 한 끝에서
별이 되리라 믿었다
핏빛 동백꽃이 되리라 믿었었다

 

멸치가 그물에 걸려 뭍으로 올려지고
끓는 물에 담겼다가
채반에 건저져 건조장에 놓이고
어느 날, 멸치는 말라 비틀어진 건어물로 쌓였다
그리고, 멸치는 실존의 식탁에서

머리가 뜯긴 채 고추장에 찍히거나
끓는 냄비 속에서 우려내진 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내가 멸치였을 때
별이 되리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 그 배를 타고 싶었다 

그 배를 타고 싶어

새벽 바다에 가면

검고 흐린 배들이 떠 있었다

닻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배 뒤에서 다른 배가

돛을 올리고 있었다

뱃사람들이 뱃사람들끼리

배를 타고 있었다

검고 흐린 배들이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새벽 바다에 배들이 떠 있었다

그 배를 타고 수평선을 넘고 싶었다

그 배를 타고 싶어 새벽바다에 가면

뱃사람들이 뱃사람들끼리

출렁이고 있었다

그 배를 타고

수평선을 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

* 이건청시집[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서정시학  

 

* 청산 가는 길  

청산은 멀다. 청산은 벼랑으로 가득 찬 별 아래 어디쯤에서

흐려지고 있는데, 빨간 갑옷에 반점 선연한 무당벌레 한 마리가

날며, 기며, 찾아가야 할 곳.....청산은 멀다 *

* 이건청시집[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서정시학  

 

* 아지랑이

이른 봄

땅 속에서

겨울을 보내던

물이

흙을 밀고

길을 낸 후

복수초

노란 꽃을

산등성이

양지쪽으로

밀어

올리고 있는데

 

언제쯤

나도

종이컵

몇 개의쯤의

물 되어

노고지리 소리

섞인

그 길로

산수유꽃도

매화도

밀고

돌아 와

햇살 밝은

산등성이쪽에서

아른거리고 있을 텐데 

 

* 노고지리

2월 찬바람 속, 노고지리를 찾아갑니다. 들판, 채전 작년 배추밭엔 말라붙은 배춧잎들이 널려 있습니다. 간혹, 버려진 채 겨울을 난 지즈러기 배추도 2월 찬바람 속에 봄동 푸른 잎으로 살아납니다. 봄동 푸른 잎 사이를 날며, 기며, 들판에 와 있는지, 노고지리를 찾아갑니다. 노고지리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던 때도 있었습니다. 노고지리는 푸른 보리 물결 속에서 솟구쳐, 제자리 날갯짓으로 솟아오르며 또르르 또르르 울었습니다. 머리 위에 깃을 단 뿔종다리 울음소리가 온 들판을 채우고 나면, 들판을 넘쳐난, 나머지 소리가 아지랑이가 되어 아른거리곤 했습니다. 가물가물 솟구쳐 오르는 노고지리를 따라 고개를 치켜들고 바라보다 보면 두 눈에 눈물이 괴곤 했습니다.

 2월의 찬바람 속 노고지리를 찾아갑니다.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하늘은 며칠째 황사입니다. 혹시 와 있을지도 모를, 머리 위에 깃을 단 작은 새를 찾아, 작년 채전 말라붙은 배춧잎 사이 봄동 푸른 잎을 찾아갑니다. 노고지리를 찾아갑니다.

* 이건청시집[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세계사 

 
* 산사에서

산 너머 바다에 갈까, 바다에 가 개펄에 빠질까, 마애불도 풍경風磬도 그냥 버리고 지금, 이 산을 넘으면 아직도 추운 폐선은 기다리고 있을까. 불면과 이명, 봉투 속 하얀 알약들과 버려진 구두짝, 소주병들은 아직 거기에 그냥 녹슬고 있을까. 산 너머 바다에 갈까, 발목까지, 무릎까지 빠지면서 소금밭에 퍼지는 노을이 될까. * 

* 이건청시집[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세계사 
 
* 절을 찾아 가는 길 -오세영에게
눈 덮인 산자락들이 겹쳐지고
겹쳐진 산자락 속
나무들이 반쯤 지워져 있다
희미하다. 다른 나무끼리 섞여
겨울 산을 이루고 있다
새들까지 날아가 그 속에 섞여 무욕의 산을
만든다. 길길이 쌓인 눈이
사람을 미끄러뜨리면서
발길을 막는데, 절은 안 보이고
어딘가에 그냥 서서 겨울을 견디겠지
생각하며 걸음을 옮긴다
눈발 속 어딘가에서 풍경이 운다
이 골짝 어딘가에 절이 있나보다
풍경이 목쉰 기침소리로 우는 거기  
절은 지붕 끝자락을 하늘로 치켜든 채
겨울 내내, 그 자세로 서있다. 아니
그대로가 아니라 조금씩
기울면서 서 있다. 기울면서
짐들을 덜어내고 있다
불단도 향로도 버리고
문짝도 대들보도 버리고
때묻은 목탁까지 버리면서
마지막 말 몇 마디 찾고있는 절
눈 쌓여 아득한 산 저쪽
힘든 적멸보궁 하나 서 있다

 
* 저녁 눈

저물녘 눈발 속으로

새 한 마리 나네

굴참나무 숲을 지나 더 먼

산 속으로 가네

이 산, 겨울나무

가는 가지에 날개를

접을 것인데, 거기가

꿈자리일 텐데

저물수록 눈발 거세어

앞을 가리네

추운 다리로 서서 꾸는

새의 꿈이

장다리꽃 노오랗게 핀 봄날이기를

저물녘 눈발 속으로

새 한 마리 나네 *

* 이건청시집[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세계사 

 

* 빈 산

빈 산 하나 있었네

하루 종일 바람이

스쳐가고 있었네

마른 다래 덩굴이 가슴을

휘감고 있었네. 그냥

겨울이었네

흐르던 물이

경사진 자리에서

얼어붙었네. 얼음 위로

산사의 새벽 목어 소리가

스쳐가고 있었네

밤새

언 가슴을

휘감고 있었네


새벽까지

눈발이 스치고 있었네. 그냥

겨울이었네

* 이건청시집[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세계사 

 
움직이는 산
객사에 누워 뒤척이는 새벽
벌레들이 운다
벌레들이 푸른 울음판을 두드려
울려내는 청명한 소리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반야봉 하나를 뒤덮고
마침내 그 봉우리 하나를 통째로 떠메고
조금씩 떠가는 게 보인다
새벽이 깊을수록 더 깊어진 울음의 강이
산을 싣고 유유히 흐르는 게 보인다
아래쪽 산자락을 잘팍잘팍 적시면서
벌레 소리에 떠가는 산
골짜기의 절간까지, 싸리나무 일주문까지
벌레들이 울음소리로 떠메고
남해 바다로 가고 있는 게 보인다 *
 
* 하류

거기 나무가 있었네

노을 속엔

언제나 기러기가 살았네

붉은 노을이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면

거기 나무를 세워두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네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 하늘 아래

창문을 열고 바라보았네

발뒤축을 들고 바라보았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희미한 하류로

머리를 두고 잠이 들었네

나무가 아이의 잠자리를 찾아와

가슴을 다독여 주고 돌아가곤 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일만 마리 매미 소리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네

모든 대답이 거기 있었네

그늘은 백사장이고 시냇물이었으며

삘기풀이고 뜸부기 알이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이제는 무너져 흩어져 버렸지만

둥치마저 타 버려 재가 돼 버렸지만

금관 악기 소리로 퍼지던 노을

스쳐가는 늦기러기 몇 마리 있으리

귀 기울이고 다가서 보네

까마득한 하류에 나무가 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

* 이건청시집[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세계사 

 

* 소금 

폭양 아래서 마르고 말라, 딱딱한 소금이 되고 싶던 때가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쓰고 짠 것이 되어 마대 자루에 담기고 싶던 때가 있었다. 한 손 고등어 뱃속에 염장질려 저물녘 노을 비낀 산굽이를 따라가고 싶던 때도 있었다. 형형한 두 개 눈동자로 남아 상한 날들 위에 뿌려지고 싶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딱딱한 결정을 버리고 싶다. 해안가 함초 숲을 지나, 유인도 무인도를 모두 버리고, 수평선이 되어 걸리고 싶다. 이 마대 자루를 버리고, 다시 물이 되어 출렁이고 싶다 *

* 이건청시집[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서정시학

 

* 이건청(李建淸)시인 

-1942년 경기 이천 출생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녹원문학상·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수상

-시집 [이건청 시집][목마른 자는 잠들고][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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