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나팔꽃 시 모음

효림♡ 2010. 7. 1. 08:34

                      

 

* 나팔꽃 - 허영자

아무리 슬퍼도 울음일랑 삼킬 일

아무리 괴로워도 웃음일랑 잃지 말 일

아침에 피는 나팔꽃 타이르네 가만히 *

 

* 나팔꽃 - 정호승  

한쪽 시력을 잃은 아버지

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

까만 나팔꽃 씨를

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

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 *

 

조금이었으므로 다였노라 - 김영승

이렇게 풍성히, 풍만히, 탐스럽게

나팔꽃이 수십, 수백 송이 활짝 피었으니

 

좋은 일이 있으려나 보다

 

아니 이렇게 나팔꽃이 활짝 핀 게 좋은 일

 

이렇게 좋은 일이 있으려고

그 以前도 * 

 

* 나팔꽃 우체국 - 송찬호 

요즈음 간절기라서 꽃의 집배가 좀 더디다

그래도 누구든 생일날 아침이면 꽃나팔 불어준다

어제는 여름 꽃 시리즈 우표가 새로 들어왔다

요즘 꽃들은 향기가 없어 주소 찾기가 힘들다지만

너는 알지? 우리 꿀벌 통신들 언제나 부지런하다는 걸

 

혹시 너와 나 사이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다 하더라도

이 세계의 서사는 죽지 않으리라 믿는다

미래로 우리를 태우고 갈 꽃마차는

끝없이 갈라져 나가다가도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저와 같은 나팔꽃 이야기일 테니까

 

올부터 우리는 그리운 옛 꽃씨를 모으는 중이다

보내는 주소는, 조그만 종이봉투 나팔꽃 사서함

우리 동네 꽃동네 나팔꽃 우체국

 

* 나팔꽃 - 목필균

어둠에 지쳐
새벽 창문을 열면
나를 불러 세우는
붉은 나팔 소리

나이만큼 기운 담장을 타고
음표로 그려진
푸른 잎새의 노래

밤새
쏟아지던 비에
말끔하게 닦여진
환한 미소 따라

달려가는 귀바퀴

 

* 나팔꽃 - 나태주

담벼락
가파른 절벽을
벌벌 떨며 기어올라간

나팔꽃의 덩굴손이
꽃을 피웠다
눈부시다
성스럽다

나팔꽃은 하루 한나절을 피었다가
꼬질꼬질 배틀려 떨어지는 꽃
저녁 때 시들기 시작하더니
다음날 아침 자취조차 없어졌다

그러나 빈 자리
그 어떤 덩굴손이나 이파리도
비껴서 갔다 
나팔꽃 진 자리
더욱 눈부시다
성스럽다
가득하다

 

* 나팔꽃 - 나태주 

여름날 아침, 눈부신 햇살 속에 피어나는 나팔꽃 속에는 젊으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얘야, 집안이 가난해서 그런 걸 어쩐다냐. 너도 나팔꽃을 좀 생각해보거라

주둥이가 넓고 시원스런 나팔꽃도 좁고 답답한 꽃 모가지가 그 밑에서 받쳐주고

있지 않더냐. 나는 나팔꽃 꽃 모가지가 될 수 없으니, 너는 꽃의 몸통쯤 되고

너의 자식들이나 꽃의 주둥이로 키워보려무나. 안돼요, 아버지. 안 된단 말이에요

왜 내가 나팔꽃 주둥이가 되어야지, 나팔꽃 몸통이 되느냔 말이에요!  

 

여름날 아침, 해맑은 이슬 속에 피어나는 나팔꽃 속에는 아직도 대학에 보내달라

투덜대며 대어드는 어린 아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리는 젊으신 아버지의 애끓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


* 나팔꽃 - 송수권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허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종(鐘)까지 매어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

 

* 나팔꽃과 개미 - 고영민

나팔꽃을 들여다보니 그 속
개미 서너 마리가 들어있다
하느님은 가장 작은 너희들에게 나팔꽃을 불게 하시니

나팔꽃은 천천히 하늘로 기어오르고
하루하루의 푸른 넝쿨줄기
개미의 걸음을 따라가면
나팔꽃의 환한 목젖
그 너머

개미는 어깨에 저보다 큰 나팔꽃을 둘러메고
둥둥, 하늘 북소리를 따라
입 안 가득 채운 입김을 꽃속에 불어넣으니
아, 이 아침은 온통 강림하는
보랏빛 나팔소리와 함께 *

 

* 나팔꽃 - 이영광
가시 난 대추나무를 친친 감고 올라간 나팔꽃 줄기, 그대를 망설이면서도 징하게 닿고 싶던 그날의 몸살 같아 끝까지 올라갈 수

없어 그만 자기의 끝에서 망울지는 꽃봉오리, 사랑이란 가시나무 한그루를 알몸으로 품는 일 아니겠느냐 입을 활짝 벌린 침묵

아니겠느냐 *

 

* 나팔꽃 봉오리 하나가 - 이윤학 

나팔꽃 봉오리 하나가
내 창문에 와 귀를 대고
뭔가를 엿듣기 시작했다
닫힌 창문 곁에 와
한낮의 방충망에 귀를 대고
고요한 방 안을 탐색하고 있었다

돌아와 창문을 열면
나팔꽃 봉오리 하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묵묵히 지켜보던 나팔꽃 봉오리 하나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향기를 전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내 창문은 안에서 닫혀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팔꽃 봉오리는 창문을 등지고 있었다
나는 그때에야 나팔꽃처럼 창문 밖
드넓은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

 

* 나팔꽃들의 행진(行進) - 신현정
이른 아침, 마당 수도가에 나와 양치 및 세수 하다 

나팔꽃 핀 것 보면서 아ㅡ 아ㅡ 아 입안에서 물을 우물거리다
문득 나팔꽃을 따라 높다랗게 오르고 싶어지다
나팔을 불면서 오르고 싶어지다
이대로 줄 타는 광대이면 어떨까 싶어지다
신명이 좀 나면 어때서, 아뿔사 발을 헛딛는 척도 해볼까나
나팔을 일부러 놓아버릴까나
나팔을 아래로 아래로 까마득히 떨어뜨려보고 싶어지다
나팔을 불며 춤추듯 나팔을 불며 높다랗게 오르며
나팔을 떨어뜨리며.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나팔꽃이 피면 - 곽재구 
나팔꽃이 피면
함남 도안에 살았다던
이모 생각이 나
여학교 작문 시간
일본말 하이꾸가 쓰기 싫어
원고지 빈 칸마다
나팔꽃 한 송이를 새겼다던
눈이 맑은 이모 생각이 나
함남 도안
백석이 쩔쩔 끓는 귀리차를 마시며
고원선 막차를 기다리던 곳
기다리다 흩날리는
눈송이를 바라보았던 곳
나팔꽃이 피면
낡은 가족 사진 속
백석에게 연애 편지
백 섬도 썼다는
이모 생각이 나 *

 

나팔꽃 씨 - 정병근
녹슨 쇠울타리에
말라 죽은 나팔꽃 줄기는
죽는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기어간
나팔꽃의 길이다
줄기에 조롱조롱 달린 씨방을 손톱으로 누르자
깍지를 탈탈 털고
네 알씩 여섯 알씩 까만 씨들이 튀어나온다
손바닥 안의 팔만 대장경
무광택의 암흑 물질이
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
마음에 새기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이냐
살아서 기어오르라는
단 하나의 말씀으로 빽빽한
환약 같은 나팔꽃 씨
입속에 털어넣고 물을 마셨다
오늘 밤, 온 몸에 나팔꽃 문신이 번져
나는 한 철 환할 것이다 *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정춘 시 모음  (0) 2010.07.12
여름 시 모음  (0) 2010.07.09
이건청 시 모음  (0) 2010.06.25
장마 시 모음  (0) 2010.06.21
박몽구 시 모음  (0) 2010.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