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네 이 저녁을
빈 깡통 두드리며
우리집 단칸방에
깡통 거지 앉아 있네
빗물소리
한없이 받아주는
눈물 거지 앉아 있네 *
* 죽편(竹篇) 1 -여행
여기서부터, ㅡ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
* 죽편(竹篇) 2 -工法
하늘은 텅 빈 노다지로구나
노다지를 조심해야지
조심하기 전에도
한 마디 비워 놓고
조심하고 나서도
한 마디 비워 놓고
잣대 눈금으로
죽절(竹節) 바로 세워
허허실실 올라가 봐
노다지도 문제 없어
빈 칸 닫고
빈 칸 오르는
푸른
아파트 工法
* 죽편(竹篇) 3 -님
사월 초파일은 오신 님의 날
오늘은 대나무조차도 오신 나의 님이외다
하늘 꼳대기까지 마디마디 들숨으로 닿아 오르다가 이윽고 안으로 구부리며 날숨을 비워 내린 님이외다
마치, 바람을 잡아당기듯 虛心을 탄 나의 님
반동그란 활 모양의 神모양이외다
* 첫사랑
가난뱅이 딸집 순금이 있었다
가난뱅이 말집 춘봉이 있었다
순금이 이빨로 깨트려 준 눈깔사탕
춘봉이 받아먹고 자지러지게 좋았다
여기, 간신히 늙어버린 춘봉이 입 안에
순금이 이름 아직 고여 있다 *
* 균열
내 오십 사발의 물사발에
날이 갈수록 균열이 심하다//
쩍쩍 줄금이 난 데를 불안한 듯
가느다란 실핏줄이 종횡무진 짜고 있다//
아직 물 한 방울 새지 않는다
물사발의 균열이 모질게도 아름답다 *
* 혼자서 부른 노래
살아서 텅 빈 날은 당신 없는 날//
죽어서 텅 빈 날도 당신 없는 날//
당신은 텅 빈 날만 아니 오십니다 *
* 텅
범종이 울더라
벙어리로 울더라
허공에서
허공에서
허공은
벙어리가 울기 좋은 곳
허공 없으면
울 곳 없으리 *
* 종소리
한번을 울어서
여러 산 너머
가루가루 울어서
여러 산 너머
돌아오지 마라
돌아오지 마라
어디 거기 앉아서
둥근 괄호 열고
둥근 괄호 닫고
항아리 되어 있어라
종소리들아 *
* 빨랫줄
그것은, 하늘아래
처음 본 문자의 첫 줄 같다
그것은,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방울은 즐겁다
그러나,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당겨주는 힘
그 첫 줄에 걸린 것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 뿐이다 *
* 새벽
흰 꼬리 고양이 울음소리가
문지방에 희미하게 걸렸습니다
* 돛
바다 위, 거미줄 친 돛단배들
물거미 입에 물린 흰나비의 우화(羽化)들
* 30년 전 - 1959년 겨울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
ㅡ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
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
그곳이 고향이란다 *
* 카렌다 호수
나에게는 참깨밭의 꿀벌 같은
하도나 이쁜 늦둥이 어린 딸이 있어
오늘은 깨잘도 입에 달아주면서
카렌다 걸어놓고 숫자를 읽히는데
아빠
2는 오리 한 마리
아빠
22는 오리 두 마리
아빠
우리 함께 호수공원에 갔을 때
뒷놈 오리가 앞놈을 타올라 물을 먹여 죽였어요
하길래설랑
나는 저런저런 하다가
나도 호숫가 물소리로 그럼그럼 했더라 *
* 기러기
허드레
허드레
빨랫줄을
높이 들어올리는
가을 하늘
늦비
올까
말까
가을걷이
들판을
도르래
도르래 소리로
날아오른 기러기떼
허드레
허드레
빨랫줄에
빨래를 걷어가는
분주한 저물녘
먼
어머니 *
* 초로(草露)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까지 갖고 싶어진다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만한 이슬방울이고
이슬방울 속의 살점이고 싶다
나보다 어리디어린 이슬방울에게
나의 살점을 보태 버리고 싶다
보태 버릴수록 차고 달디단 나의 살점이
투명한 돋보기 속의 샘물이고 싶다
나는 샘물이 보일 때까지 돋보기로
이슬방울을 들어 올리기도 하고 들어 내리기도 하면서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타래박까지 갖고 싶어진다 *
* 경내(境內)
하늘이 조용한 절집을 굽어보시다가 댓돌 위의 고무신 한 켤레가 구름 아래
구름보다 희지고 있는 것을 머쓱하게 엿보시었다. *
* 동화
어느 여름 날 밤이었습니다
마부자식의 몸에서는 망아지 냄새가 난다는 내 나이 아홉 살 때 나는 아버지만큼 젊은 조랑말과 그 말머리에 흔들려서 찰랑거린 놋쇠방울소리가 하도나 좋았습니다 그러면 나도 커서 마부가 되겠노라 마굿간에 깃든 조랑말의 똥그랗고 검은 눈동자 속에 얼비친 별 하나 별 둘을 들여다보며 별밤지기로 놀았습니다
이런 날 밤이면 이따금 조랑말의 말머리에서 찰랑거리던 놋쇠방울소리가 밤하늘로 날아올라 별빛에 부딪쳐서 영롱하게 바스라지는 소리들을 눈이 시리도록 우러렀던 나만의 황홀한 밤이 있었습니다 *
너 아직 누웠거라
맹인 걸음으로
봄비는 오느니
오는 비 간다 하고
가는 비 온다 하고
귀머거리 시늉으로
무덤 속인 양 *
* 봄, 파르티잔
꽃 그려 새 울려 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
* 서정춘시인
-1941년 전남 순천 출생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1년 박용래문학상, 2007년 유심작품상 수상
-시집 [죽편][물방울은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