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심호택 시 모음

효림♡ 2010. 7. 23. 08:09

* 똥구멍 새까만 놈 - 심호택  
대엿 살 철부지 때
할아버지께 붓글씨 배웠지요
종이 귀할 때라 마분지에다
한일자 열십자 수월찮이 그렸지요
종이에 흰 구석 남긴 날
그분께서 꾸짖으시기를
듣거라
최생원네 손자 공부하는 법이니라
연필로 먼저 쓰고 그 위에
철필로 다시 쓰고 그 위에
또다시 붓으로 빽빽이 써서
그 종이에 허연 데 도무지 아니 보이구서야
뒷간으로 보내느니라-
눈물 그렁그렁
꿇어앉아 그 말씀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부아통이 터졌지요 그래
징게맹경 어딘가에 최생원네 손자란 놈
제아무리 잘났어도
똥구멍 새까만 놈일 거라 생각했지요 *
* 심호택시집[하늘밥도둑]-창비

 

* 최대의 풍경

청년 발레리는 스승을 따라 들판으로 갔다

스승은 아주 소박한 꽃들을 꺾었다

수레국화와 개양귀비를

불 같은 대기의 정적 속에서 한 아름씩이나

그리고 스승은 제자에게

조숙한 여름이 노랗게 물들이기 시작하는

평원을 보여주며 말하였다

보세요, 가을의 첫 심발이 대지 위에 울리는 것을.....

가을이 왔을 때 그러나

스승은 이 세상에 없었다

폴 발레리의 [바리에테]에서 읽었거니와

내가 마음의 스승을 찾아간 날은

어느 숨막히는 가을날

말없이 뜰을 거닐던 그는

손을 들어 먼 산줄기를 가리켰다

보세요, 저기 차령산맥을.....

저와 같이 내달려 마침내 고군산으로 빠지지요

거기 몇 개의 섬을 이루지요

이십 세기 수백 수천의 시인 가운데

발레리를 비롯한 몇 사람이나 살아남겠으며

그러니 어찌 무서운 일이 아니겠는가

나이 육십에 나는 문학을 새로 시작하지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바라보고 있었다 저 멀리

운무에 싸인 푸른 능선들이 남으로 가고

부끄러움에 눈을 떨구니

벚나무 잎새가 발등에 와서 닿았다 *

 

* 회오리
나는 외로운 회오리
너는 서러운 문풍지
사나운 눈보라로 몰아붙이면
승냥이 소리로 너는 울었지
바닷가 언덕배기 외딴집 한 채
떠나갈 테면 떠나가라고
훗날에야 물론 말할 수 있겠지
뭐 그렇고 그런
별것 아닌 돌개바람
그뿐이었다고 *

 

* 반달곰 
녀석이 옹달샘에 나타나
석간수를 찍어 맛보고
찔레꽃 봉오리를 톡톡 건드리면
숲은 서서히 요동하는 것이었다
그럴라치면
웬 변성기의 뻐꾸기 한 마리
퍼들껑 깃을 치며 깨어나
죽겄네 살겄네
볼멘소리로 울어대는 것이었다
저 새가 벙어리뻐꾸기라고
천만에 검은등뻐꾸기라고
계룡산 처사와 모악산 거사는
서로들 우기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워워! 혀짜른 네 음절로
아무렇게나 우는 것을
녀석은 숲을 깨운 일만이 대견해
그 벙어린지 검은등인지
큰일이 났다고 자지러지건 말건
유유히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등성이를 오르는 것이었다

 

* 그날 이후 

너의 자그만 어깨 너머로

쪽빛 바다가 보인다

쟁반에 누운 술병과

접시에 엎드린 빠알간 꽃게도

환히 보인다

쉼 없는 물결의 노래도

그날 이후 다시는

그곳에 가보지 않았지만 *

 

* 겨울편지 

아픈 건 그럭저럭 나았소

올해도 김장 몇 포기 담갔소

 

사랑이여

당신이 사준 고동색 파카는

시골집 수도펌프가 입게되었소 *

 

* 그 만큼 행복한 날이
그만큼 행복한 날이
다시는 없으리
싸리빗자루 둘러메고
살금살금 잠자리 쫓다가
얼굴이 발갛게 익어 들어오던 날
여기저기 찾아보아도
먹을것 없던 날  

 

* 포근한 저녁 

내 생애의 수많은 저녁 중에

가장 포근한 저녁은

황혼인지 샐녘인지 분간 못하게

어슴푸레한 미명이었다

 

어서 일어나 학교 가거라

부시시 깨어 듣는 어른들 말씀이

한바탕 웃음 끝에

거짓말이 되는 순간이었다

 

낮잠 자는 나를 놀리자고

누군가 일부러 지어낸 말인 줄을

알아차린 그 다음

부자가 된 듯한 동안이었다 *

 

* 투명  

가을날이었다

들판에 뻗친 흰 물줄기가 하늘에 닿아 있는

그런 날이었다

사람들이 나더러 내성적이라던

고등학교 2학년

내 자전거가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가시내들 앞에 뽐내며

멋들어지게 커브를

꺽다가 그만

콰다당 넘어지고 말았다

 

먼 밭에서

어머니는 가슴이 덜컥했다고 한다

보이지도 않는 밭에서

녹두를 거두고 있던 어머니는

그 소리가 내 소리인 줄 알았다고 한다

 

* 신록

어머니 없으면 나 혼자 살지

말이라도 그런 말을

생각이라도 그런 생각을

무엇하러 하였노

 

그야말로

어머니 안 계신 오늘

천지는 온통 푸른 초여름

고생고생 가르쳐놓으니

이게 무슨 짓이냐

풀잎들 반짝이면 메스껍고

잎새들 팔랑이면 어지럽고

그야말로 어머니 안 계신 오늘

천지는 온통 푸른 초여름 *

 

* 똥지게 

우리 어머니 나를 가르치며

잘못 가르친 것 한 가지

일꾼에게 궂은일 시켜놓고

봐라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되나

저렇게 된다

똥지게 진다 *

 

* 하늘밥도둑 
망나니가 아닐 수야 없지
날개까지 돋친 놈이
멀쩡한 놈이
공연히 남의 집 곡식줄기나 분지르고 다니니
이름도 어디서 순 건달 이름이다만
괜찮다 요샛날은
밥도둑쯤 별것도 아니란다
우리들 한 뜨락의 작은 벗이었으니
땅강아지, 만나면 예처럼 불러주련만
너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
살아보자고, 우리들 타고난 대로
살아갈 희망은 있다고
그 막막한 아침 모래밭 네가 헤쳐갔듯이
나 또한 긴 한세월을 건너왔다만
너는 왜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 거냐?
하늘밥도둑아 얼굴 좀 보자
세상에 벼라별 도적놈 각종으로 생겨나서
너는 이제 이름도 꺼내지 못하리
나와보면 안단다
부끄러워 말고 나오너라 *

* 심호택시집[하늘밥도둑]-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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