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꽃 - 이광수
임 주신 연꽃봉을 옥화병에 꽂아놓고
밤마다 내일이나 필까필까 하였더니
새벽이 가고 또 가도 필 뜻 아니 보여라
뿌리 끊였으니 핀들 열매 바라리만
모처럼 맺힌 봉을 못 펴보고 갈 양이면
제 비록 무심하여도 내 애닯아 어이리
이왕 못 필 꽃은 버림즉도 하건마는
시들고 마르도록 두고두고 보는 뜻은
피라고 벼르던 옛 뜻을 못내 애껴함이외다
불이 물 속에서도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은 연꽃을 보면 안다. 물로 타오르는 불은 차가운 불, 불은 순간으로 살지만 물은 영원을 산다. 사랑의 길이 어두워 누군가 육신을 태워 불 밝히려는 자 있거든 한 송이 연꽃을 보여 주어라. 닳아 오르는 육신과 육신이 저지르는 불이 아니라 싸늘한 눈빛과 눈빛이 밝히는 불. 연꽃은 왜 항상 수면에 잔잔한 파문만을 그려 놓는지를..... * * 오세영시집[꽃피는 처녀들의 그늘 아래서]-고요아침 * 蓮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하는 이별이게, 蓮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 수련별곡(水蓮別曲) - 김춘수 * 연꽃 -심우도 - 朴堤千 * 연꽃 구경 - 정호승 연꽃이 피면
달도 별도 새도 연꽃 구경을 왔다가
그만 자기들도 연꽃이 되어
활짝 피어 나는데
유독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만이
연꽃이 되지 못하고
비빔밥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받아야 할 돈 생각을 한다
연꽃처럼 살아보자고
아무리 사는게 더럽더라도
연꽃같은 마음으로 살아보자고
죽고 사는게 연꽃같은 것이라고
해마다 벼르고 별러
부지런히 연꽃구경을 온 사람들인데도
끝내 연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연꽃들이 사람 구경을 한다
해가 질때쯤이면
연꽃들이 오히려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가장 더러운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바람이 분다
그대는 또 가야 하리
그대를 데리고 가는 바람은
어느땐가 다시 한 번
낙화(落花)하는 그대를 내 곁에 데리고 오리
그대 이승에서
꼭 한 번 죽어야 한다면
죽음이 그대 눈시울을
검은 손바닥으로 꼭 한 번
남김없이 덮어야 한다면
살아서 그대 이고 받든
가도 가도 끝이 없던 그대 이승의 하늘
그 떫디떫던 눈웃음을 누가 가지리오? *
연꽃 보러 간 연꽃늪에 연꽃은 보이지 않고
우산만한 연잎에 모여든 빗방울들만
비에 젖은 나를 기다리네
어떤 빗방울은 제 몸 속에 피보다 붉은 연꽃을 피워내고
어떤 빗방울은 아직 피워내지 않은 꽃줄기마다
가시를 번쩍이고 있네
어떤 빗방울은 바람에 날리는 꽃술마다 눈을 달아서
늪 가득히 띄운 채
연꽃 보러 온 사람들 하나하나를 지켜보느니
연꽃 보러 간 연꽃늪에서
보지도 못한 연꽃 속 연실처럼 자라나는
내 얼굴, 내 마음 속 죄만 들키고 말았네
군데군데 입을 벌린 구멍 사이로 드러난
땅속 진흙처럼 어지러운
내 마음의 진창을 들키고 말았네 *
* 그대의 눈동자는 푸른 연꽃잎 -인도 고시(古詩)
그대의 눈동자는 푸른 연꽃잎
그대의 치아는 하얀 말리 꽃
그대에게서 연꽃 향기가 난다.
그대의 몸도 꽃잎처럼 휘날리련만
밤낮으로 사랑하고 사랑하여도
돌과 같이 단단한 그대의 마음 *
* 수련 - 안도현
수련 잎사귀 위에
일광욕하러 나온 물뱀
물뱀 지나간 자리
꿰맬 수 없어
빨간약을 구할 데 없어
수직의 수련이 울고 있다
* 연꽃의 기도- 이해인
겸손으로 내려앉아
고요히 위로 오르며
피어나게 하소서
신령한 물위에서
문을 닫고
여는 법을 알게 하소서
언제라도
자비심 잃지 않고
온 세상을 끌어안는
둥근 빛이 되게 하소서
죽음을 넘어서는 신비로
온 우주에 향기를 퍼뜨리는
넓은 빛 고운 빛 되게 하소서
* 가시연꽃 - 배한봉
우포늪 가득 덮은 잎들 사이에 검초록 투구 같은 꽃봉오리가 무더기 무더기 군락을 이루고 있다. 늪의 자궁이 한해 마지막으로 생산한 생명의 도화선인 갈색 줄기를 따라 지름 1.5미터 억센 잎을 찢어발긴 채 솟아 있다. 온몸에 돋은 가시로 제 살을 물어뜯지 않고서는 터질 수 없는 선지빛 꽃의 뇌관. 그 고통과 상처의 시간이 창천마저 시퍼렇게 질리게 한다. 저와 같은 탄생의 처절한 아름다움을 나는 한 번이라도 가졌던가. 범람하던 분노와 증오. 탄식마저 사랑해야 할 여름의 끝, 빈손으로 돌아온 이들을 위해 불을 당기는 저 꽃 앞에서 나는 자꾸만 울고 싶은 것이다
참혹하고도 황홀한 저 방화
오늘도 가시연꽃이 핀다
70만 평 우포늪 물도 끄지 못하는 내 마음 습지의 화염
* 가시연꽃 - 문인수
방패 같은 커다란 잎이 우포늪 가득 착 발려 있다. 잎의 표면엔 무슨 두드러기 같은 가시가 섬뜩섬뜩 돋아 있는데, 그렇듯 제 뿌리참의 그 무엇을 무섭게 덮어 누르고 있다. 그런데 그걸 또 불쑥 뚫으며 솟아오른 꽃대궁. 창 끝 피칠갑의 꽃봉오리에도 줄기에도 그런 가시가 돋아 있다
저 온갖 적의와 자해의 시간이 오래 무더웠겠다
그러나 누가 말할 수 있으리
마침내 고요히 올라앉은 만개(滿開), 만 개의 캄캄한 문, 만 번은 또 무너지며 신음하며 열어제쳤겠다 악의 꽃, 저 길의
끝
오, 저 고운 웃음에 대해 숨죽여라 지금
소신공양 중이다 *
* 가시연 - 조용미
태풍이 지나가고 가시연은 제 어미의 몸인 커다란 잎의 살을 뚫고 물속에서 솟아오른다
핵처럼 단단한 성게 같은 가시봉오리를 쩍 가르고
흑자줏빛 혓바닥을 천천히 내민다
저 끔찍한 식물성을,
꽃이 아니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꽃인 듯한
가시연의
가시를 다 뽑아버리고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 나는 오래 방죽을 서성거린다
붉은 잎맥으로 흐르는 짐승의 피를 다 받아 마시고 나서야 꽃은
비명처럼 피어난다
옷 가장자리의 방죽이 서서히 허물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금이 가고 있는 그 소리를
저 혼자 듣고 있는
가시연의 흑자줏빛 혓바닥들. *
못 가득 퍼져간 연잎을 처음 보았을 때
저는 그것이 못 가득 꽃을 피우려는
연잎의 욕심인줄 알았습니다
제 자태를 뽐내기 위해
하늘 가득 내리는 햇살 혼자 받아먹고 있는
연잎의 욕심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연잎은 위로 밖으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아래로 안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직 덜 자라 위태위태해 보이는 올챙이 물방게 같은 것들
가만가만 덮어주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위로 밖으로 비집고 나오려고 서툰 대가리 내미는 것들
아래로 안으로 꾹꾹 눌러주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동란 때 그러하셨듯
산에서 내려온 아들놈 마루바닥 아래 숨겨두고
그 위에 눌러앉아 방망이질 하시던 앙다물던
모진 입술이란 걸 알았습니다
그렇게 그것들의 머리맡에서
꼬박 밤을 밝히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 돈오의 꽃 - 도종환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비 오고 바람 분다
연꽃 들고 미소짓지 말아라
연꽃 든 손 너머
허공을 보지 못하면
아직 무명이다
버리고 죽어서
허공 된 뒤에
큰 허공과 만나야
비로소 우주이다
백 번 천 번 다시 죽어라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매일 별똥이 지고
어둠 몰려올 것이다 *
* 도종환시집[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 연꽃 - 이외수
흐린 세상을 욕하지마라
진흙탕에 온 가슴을
적시면서
대낮에도 밝아
있는 저 등불 하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