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여름 시 모음

효림♡ 2010. 7. 9. 08:18

* 쓸쓸한 여름 - 나태주  
챙이 넓은 여름 모자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빛깔이 새하얀 걸로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올해도 오동꽃은 피었다 지고
개구리 울음 소리 땅 속으로 다 자즈러들고
그대 만나지도 못한 채
또다시 여름은 와서
나만 혼자 집을 지키고 있소
집을 지키며 앓고 있소 * 

 

* 여름날-마천에서* - 신경림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

* 마천은 경남 산청군에 딸린 지리산 아래 마을이다.

* 신경림시집[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랜덤하우스

* 한여름 새벽에 - 박재삼
二十五坪 게딱지 집 안에서
三十 몇 度의 한더위를
이것들은 어떻게 지냈는가
내 새끼야, 내 새끼야
지금은 새벽 여섯 시
곤하게 떨어져
그 수다와 웃음을 어디 감추고
너희는 내게 자유로운
몇 그루 나무다
몇 덩이 바위다 *

 

* 여름밤 - 이준관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여름밤은 뜬눈으로 지새우자
아들아, 내가 이야기를 하마
무릎 사이에 얼굴을 꼭 끼고 가까이 오라
하늘의 저 많은 별들이
우리들을 그냥 잠들도록 놓아주지 않는구나
나뭇잎에 진 한낮의 태양이
회중전등을 켜고 우리들의 추억을
깜짝깜짝 깨워놓는구나
아들아, 세상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은
너는 밤새 물어라
저 별들이 아름다운 대답이 되어줄 것이다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 열 손가락에 달을 달아주마
달이 시들면
손가락을 펴서 하늘가에 달을 뿌려라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짧은 여름밤이 다 가기 전에 (그래, 아름다운 것은 짧은 법!)
뜬눈으로
눈이 빨개지도록 아름다움을 보자 *

 

* 7월, 담쟁이 - 목필균
누구냐
내 마음의 벽을 잡고 올라서는 너는
7월 태풍, 모진 비바람 속에도
허공을 잡고 올라서는 집착의 뿌리
아득히 떠내려간 내 젊음의 강물
쉼 없이 쌓여진 바람벽을 기어오르는
무성한 그리움의 잎새
어느새 시퍼렇게 물든 흔들림으로
마음을 점령해가는 네 따뜻한 손길 *

 

* 여름날 - 김사인 
풀들이 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갠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

* 김사인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 여름꽃 - 이문재 
그대와 마주 서기는
그대 눈동자 바로 보기는
두렵고 또 두려운 일이어서

저기 뜨락에 핀 꽃
여름꽃을 보고 있다
어둠의 끝에서
몸을 활짝 열었던 아침꽃들
정오가 오기 전에
꽃잎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안으로 돌아가 있다
해를 바로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려워서 여름꽃은
꽃잎을 모아 합장한다
여름꽃은 자기 안으로 들어가
해의 눈동자가 된다 *

 

* 비의 냄새 끝에는 - 이재무  

여름비에는 냄새가 난다
들쩍지근한 참외 냄새 몰고 오는 비
멸치와 감자 우려낸 국물의
수제비 냄새 몰고 오는 비
옥수수기름 반지르르한
빈대떡 냄새 몰고 오는 비
김 펄펄 나는 순댓국밥 내음 몰고 오는 비
아카시아 밤꽃 내 흩뿌리는 비
청국장 냄새가 골목으로 번지고
갯비린내 물씬 풍기며 젖통 흔들며 그녀는 와서
그리움에 흠뻑 젖은 살 살짝 물었다 뱉는다
온종일 빈집 문간에 앉아 중얼중얼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혼잣소리 내뱉다
신작로 너머 홀연 사라지는 하지(夏至)의 여자 *

 

* 여름 편지 - 한영옥  

그해 여름 유난히 짱짱한 날이 있었다
그날 좋은 햇빛 속에 들어서서
대책 없는 우리 사이 두들겨 말리려고
회암사에 올라 흘린 땀 식히고 있을 때
마당 한쪽, 약수 물 동그랗게 고인 곁에
동자승 한 분도 동그랗게 웃어주었다
동자승 고운 얼굴 반쪽씩 나눠갖고
이 길, 그 길로 우리는 내달았다
이 길이 그땐 그토록 먼 길이었다
어느덧 그때처럼 또 여름이다
그쪽이여, 그 길엔 연일 비단길 꽃잎 날리는가
이쪽 이 길에도 잡풀 꽃 그럭저럭하고
올 여름 다행히 실하여 노을도 잘 흐르고
장단 맞추며 나도 이리 흥겨운 모양이니
기절한 우리 사이 가만히 내다 버리겠네
그토록 먼 길이었던 이 길로 오던 길에
흥건히 불어 빠졌던 발톱도 이젠 내다 버리겠네
그해 여름 그날, 가뭇없으라고 불어오는 밤바람
아득한 그쪽으로 그어진 능선 모조리 덮어가네. *
 

* 오광수엮음[시는 아름답다]-사과나무

 

* 수국 - 이문재

여름날은 혁혁하였다

 

오래 된 마음자리 마르자

꽃이 벙근다

꽃 속의 꽃들

꽃들 속의 꽃이 피어나자

꽃송이가 열린다

나무 전체 부풀어오른다

 

마음자리에서 마음들이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열엿새 달빛으로

저마다 길을 밝히며

마음들이 떠난다

떠난 자리에서

뿌리들이 정돈하고 있다

 

꽃은 빛의 그늘이다 *

* 꽃시그림집[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램덤하우스중앙

 

* 여름 한때 - 조성국 
가문 마당에
소낙비 온 뒤
붉은 지렁이 한 마리
안간힘 써 기어가는
일필휘지의 길
문득
길 끝난 자리
제 낮은 일생을
햇볕에 고슬고슬하게 말려
저보다 작은 목숨의 개미 떼
밥이 되고 있다 *
* 조성국시집[슬그머니]-실천문학사

 

* 또 한여름 - 김종길 
소나기 멎자
매미소리

젖은 뜰을
다시 적신다

비오다
멎고

매미소리
그쳤다 다시 일고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가는가

 

소나기 소리

매미소리에

 

아직은 성한 귀

기울이며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보내는가 *

 

* 칠팔월(七八月) - 문태준

여름은 흐르는 물가가 좋아 그곳서 살아라//

우는 천둥을, 줄렁줄렁하는 천둥을 그득그득 지고 가는 구름//

누운 수풀더미 위를 축축한 배를 밀며 가는 물뱀//

몸에 물을 가득 담고 있는, 불은 계곡물//

새는 안개 자욱한 보슬비 속을 날아 물버들 가지 위엘 앉는다//

물안개 더미같이, 물렁물렁한 어떤 것이 지나가느니//

상중(喪中)에 있는 내게도 오늘 지나가느니//

여름은 목 뒤에 크고 묵직한 물주머니를 차고 살아라 *

 

* 여름 - 최영철

쌈 싸 먹고 싶다

푸른색을 어쩌지 못해 발치에 흘리고 있는

잎사귀 뜯어

구름 모서리에 툭툭 털고

밥 한 숟갈

촘촘한 햇살에 비벼

씀바귀 얹고

땀방울 맺힌 나무 아래

아, 맛있다. *

* 최영철시집[일광욕하는 가구]-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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