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늙은 정미소 앞을 지나며 - 안도현
왼쪽 어깨가 늙은 빨치산처럼 내려앉았다
마을에서 지붕은 제일 크지만 가재 도구는 제일 적다
큰 덩치 때문에 해 지는 반대쪽 그늘이 덩치만큼 넓다
살갗이 군데군데 뜯어진 덕분에 숨쉬기는 썩 괜찮다
저녁에는 나뒹구는 새마을 모자를 주워 쓰고
밥 냄새 나는 동네나 한 바퀴 휙 둘러볼까 싶은데
쥐가 뜯어먹어 구멍난 모자 속으로 별들이 쏟아질까 겁난다
어두워지면서 못 보던 쥐들이 찾아와서 쌀통이 비었네,
에구, 굶어죽게 생겼네, 투덜대며 뛰어다니는 통에 화가 좀 났다
그럼 바닥에 수북한 까맣게 탄 쌀알 같은 쥐똥은 뭐란 말인가
밤이 되니 바람이 귓밥을 파주겠다며 달그락거린다
그렇다고 눈물 질금거리는 전등 따위 내걸지 않는다
혹자는 이미 죽어 숨이 넘어간 목숨이라는데
아직은 양철 무덤을 삐딱하게 뒤집어쓰고 버틸 만하다 *
* 안도현시집[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현대문학북스
* 시집 - 안도현
어탕국수를 만들기 위해 물고기 배를 따는 것은
그들이 평생 단 한 번도 벗지 않았던 옷을 벗기는 일
속을 들여다보면 요지경이다 창자의 길이가 일만 오천 자나 되는 물고기도 있고
부레의 크기가 황소 하품만 한 물고기도 있고 간의 두께가 나비의 날개처럼 얇은 물고기도 있다
지느러미 끝에 창을 꽂아 내 손톱 속을 찌르는 물고기도 있고
뱃속을 다 훑어냈는데 꼬리로 냄비 바닥을 치는 물고기도 있다
나는 사다리 내리고 물속을 들어가 볼 엄두도 내지 못하였으나
그들은 한시절 남달랐다 그들은 연못을 뚫는 은빛 총알이었고
밑바닥을 떼로 모여 다니는 버드나무 잎사귀였다
그들은 사상 검열의 그믈에도 걸리지 않던
수면을 찢어 붉은 깃발로 만들고 싶어 하던 어족들
하여 나는 시래기를 양념에 버무리고 마늘을 다져넣고 어탕을 끓이면서
뜨겁고 매운 연못을 한 그릇씩 들이켜던 식성 좋은 입들을 서러이 그리워한다 *
山은 저 홀로 푸르러지지 않는다네
한 山이 그 빛깔 흐려지며 그 너머 山에게 자기를 넘기면
그 빛깔 흐려진 山이 또 빛깔 흐려지며 그 너머 山에게 자기를 넘긴다네
山은 또한 저 홀로 멀리 사라지지 않는다네
한 山이 한 山을 받아 앞에 선 山에게 짙어진 빛깔 넘기면
그 山은 또 그 앞에 선 山에게 더 짙어진 빛깔 넘기고
그 빛깔 넘겨받은 山은 그 앞에 선 山에게 더더욱 짙어진 빛깔 넘긴다네
소나무 푸른 것은
우리 동네 앞산
우리 동네 앞산은
소쩍새를 키운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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