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북항 - 안도현

효림♡ 2012. 8. 9. 09:32

* 일기 - 안도현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

 

* 폭 

바다의 폭이 얼마나 되나 재보려고 수평선은 귓등에 등대

같은 연필을 꽂고 수십억 년 전부터 팽팽하다

 

사랑이여

나하고 너 사이 허공의 폭을

자로 재기만 할 것인가 *

 

* 익산고도리석불입상(益山古都里石佛立像)

내 애인은 바위 속에 누워 있었지

두 손 가슴에 모으고 눈을 감고 있었지

누군가 정(釘)으로 바위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들렸지

내 애인은 문을 밀고 바깥으로 걸어나왔지

바위 속은 환했지만 바깥은 어두웠지

내 애인은 옛날부터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 *

 

* 일월의 서한(書翰)

어제 저녁 영하 이십 도의 혹한을 도끼로 찍어 처마 끝에 걸어두었소

꾸덕꾸덕하게 마를 때쯤 와서 화롯불에 구워 먹읍시다

구부러지지 않고 요동 없는 아침 공기가 심히 꼿꼿한 수염 같소

당신이 오는 길을 내려고 쌓인 눈을 넉가래로 밀고 적설량을 재보았더니 세 뼘 반이 조금 넘었소

간밤에 저 앞산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가 숨깨나 찼을 것이오

좁쌀 한 줌 마당에 뿌려놓았으니 당신이 기르는 붉은가슴 딱새 몇 마리 먼저 이리로 날려 보내주시오

또 기별 전하리다, 총총 *

* 북항(北港) 
나는 항구라 하였는데 너는 이별이라 하였다
나는 물메기와 낙지와 전어를 좋아한다 하였는데
너는 폭설과 소주와 수평선을 좋아한다 하였다
나는 부캉, 이라 말했는데 너는 부강, 이라 발음했다
부캉이든 부강이든 그냥 좋아서 북항,
한자로 적어본다, 北港, 처음에 나는 왠지 北이라는
글자에 끌렸다 인생한테 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든지 쾌히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맹서를 저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신하기 좋은 북항,
불 꺼진 삼십 촉 알전구처럼 어두운 북항,
포구에 어선과 여객선을 골고루 슬어놓은 북항,

이 해안 도시는 따뜻해서 싫어 싫어야 돌아누운 북항,
탕아의 눈 밑의 그늘 같은 북항,
겨울이 파도에 입을 대면 칼날처럼 얼음이
해변의 허리에 백여 빛날 것 같아서
북항, 하면 아직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편이
있을 것 같아서 나를 버린 것은 너였으나
내가 울기 전에 나를 위해 뱃고동이 대신 울어준
북항, 나는 서러워져서 그리운 곳을 북항이라
하였는데 너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하였다 *

* 그 집 뒤뜰의 사과나무 
적게 먹고 적게 싸는 딱정벌레의 사생활에 대하여
불꽃 향기 나는 오래된 무덤의 입구인 별들에 대하여
푸르게 얼어 있는 강물의 짱짱한 하초(下焦)에 대하여
가창오리들이 떨어뜨린 그림자에 잠시 숨어들었던 기억에 대하여

나는 어두워서 노래하지 못했네
어두운 것들은 반성도 없이 어두운 것이어서

열몇 살 때 그 집 뒤뜰에
내가 당신을 심어놓고 떠났다는 것 모르고 살았네
당신한테서 해마다 주렁주렁 물방울 아가들이 열렸다 했네
누군가 물방울에 동그랗게 새겼을 잇자국을 떠올리며
미어지는 것을 내려놓느라 한동안 아팠네

간절한 것은 통증이 있어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 하고 나면
이 쟁반 위 사과 한 알에 세 들어 사는 곪은 자국이
당신하고 눈 맞추려는 내 눈동자인 것 같아서

혀 자르고 입술 봉하고 멀리 돌아왔네

나 여기 있고, 당신 거기 있으므로


기차 소리처럼 밀려오는 저녁 어스름 견뎌야 하네 *

* 울진 금강송을 노래함 
소나무의 정부(政府)가 어디 있을까?
소나무의 궁궐이 어디 있을까?
묻지 말고,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소광리로 가자
아침에 한 나무가 일어서서 하늘을 떠받치면
또 한 나무가 따라 일어서고 그러면
또 한 나무가 따라 일어서서
하늘지붕의 기둥이 되는
금강송의 나라,
여기에서 누가 누구를 통치하는가?
여기에서 누가 누구에게 세금을 내는가?
묻지 말고, 서로가 서로를 다스리며 그윽하게 바라보자
지금은 햇빛의 아랫도리 짱짱해지고
백두대간의 능선이 꿈틀거리는 때,
보이지 않는 소나무 몸속의 무늬가
만백성의 삶의 향기가 되어 퍼지는 때,
우리 울진 금강송 숲에서
한 마리 짐승이 되어 크렁크렁 울자 *

 

* 안도현시집[북항]-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