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매화꽃 목둘레 - 안도현

효림♡ 2013. 4. 3. 12:31

* 매화꽃 목둘레 - 안도현 

   수백 년 전 나는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마을에 나타난

어린 계집 하나를 지극히 사랑하였네 나는 계집을 분(盆)에다 심어 방안에 들였네

 

   하루는 눈발을 보여주려고 문을 열었더니 계집은 제 발로 마루 끝으로 걸어 나갔네

눈발은 혀로 계집의 목을 빨고 핥았네 계집의 목둘레는 얼룩이 져서 옥골빙혼(玉骨氷魂)이라 쓰고

빙기옥골(氷肌玉骨)이라 쓴 옛 시인들을 희롱하였네 그러다 계집은 그만 고뿔에 걸리고 말았네

 

   그날 나는 계집의 목둘레를 닦으려고 붓을 들었으나 붓끝만 살에 닿아도 싸락눈처럼 울었네

또 나는 붓을 들어 한 편의 시를 쓰려 하였으나 식솔들이 나를 매화치(梅花痴)라 비웃으며 수군대는 소리가 마당을 건너왔네

 

   나는 늙었네 늙어 초췌해진 면상을 차마 계집에게 보일 수 없었네 생의 목둘레선은 끔찍이 외로워질 때

또렷해지는 법이어서 나는 아래채로 계집의 거처를 따로 옮겼네 나의 혹애(酷愛)는 서성거리는 발소리로 건너갈 것이었네

 

   그해 섣달 초이렛날, 나는 매화 분(盆)에 물을 주라 겨우 이르고 나서 아득하여 눈을 감았네

그리하여 매화꽃은, 매화꽃은 목둘레만 남았네 *

 

* 원추리여관 
왜 이렇게 높은 곳까지 꽃대를 밀어올렸나
원추리는 막바지에 이르러 후회했다
꽃대 위로 붉은 새가 날아와 꽁지를 폈다 접었다 하고 있었다, 원추리는
어쩔 수 없이 방을 내어주고 다음달부터 여관비를 인상한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했다
멀리서 온 것이나 키가 큰 것은 다 아슬아슬해서 슬픈 것이고
꽃밭에 널어놓은 담요들이 시들시들 마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면 어린 잠자리들의 휴게소로 간판을 바꾸어 달아도 되는지 면사무소에 문의해볼까 싶었지만
버스를 타고 올라오기에는 너무나 멀고 낡은 집이어서 관두기로 했다
원추리 꽃대 그늘이 흔들리다가 절반쯤 고개를 접은 터였다 *

 

* 배꽃 
배꽃 속에 흑염소들이 몇 마리 살고 있다
뿔은 서로 떠받을 일이 없어 말랑말랑하고
엉덩이는 누구를 향해 실룩거려보지 않아 볼그족족하다
가족끼리 영 재미없는 고스톱을 치는 것도 같고
배꽃천주교회에서 미사를 보며 묵상중인 것도 같다


그런데 올봄에 꽃잎 속의 흑염소들이 싸우는 것을 본 적 있다
하늘을 윙윙 나는 비행기의 조종사들이 파업을 하자
불임의 배나무를 위해 과수원 여주인은
수정을 시키는 거라 했다 이래야 애가 생겨요, 했다
정말 환한 통증 같은 꽃잎에 혈흔이 묻어 있었다


나는 배나무 과수원을 돌아나오며
흑염소들을 위해 옛 시인의 시 한 수를 가만히 읊었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 *

 

* 벚꽃

  코끼리가 간밤에 벚나무에 몸을 비비고 떠난 뒤에 벚나무는 연분홍 코끼리 새끼들을 낳았다 이 기이한 착종에 의해

태어난 코끼리들은 울지 않았다 벚나무의 한숨이 십 리 밖까지 번졌다

 

  이 소식을 듣고 맨 처음 달려온 것은 수의사와 식물학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둘러앉아 화투 패를 맞추었고 몇 순배 흰

술잔을 돌렸다 벚나무의 저고리 고름이 붉어젔다

 

  어린 코끼리들의 양육이 부담스러웠을까 석유 삼키듯 자신을 탕진하고 싶었을까 아무도 세상을 무거워하지 않는데

벚나무 혼자 가지 끝이 찌릿찌릿 저렸다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 통증이 가지를 마구 흔들었다

 

  그 순간, 어린 코끼리들이 벚나무의 사생아처럼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식물학자는 하강 속도가 초속 오 센티미터라고

짧게 기록했다 수의사는 삶이 삶을 벗어버리는 따뜻하고 슬픈 속도에 취해 청진기를 꺼낼 수 없었다

 

  봐라, 벚나무 아래 뿔뿔이 돛대도 아니 달고 떠나는 저 어린 코끼리들의 정처 없는 발자국 좀 봐라 *

 

* 극진한 꽃밭

봉숭아꽃은

마디마디 봉숭아의 귀걸이, 

 

봉숭아 귓속으로 들어가는 말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제일 먼저 알아들으려고 매달려 있다가

달량달량 먼저 소리를 만들어서는 귀속 내실로 들여보내고 말 것 같은,

마치 내 귀에 여름 내내 달려 있는 당신의 말씀 같은, 

 

귀걸이를 달고 봉숭아는

이 저녁 왜 화단에 서서 비를 맞을까

왜 빗소리를 받아 귓불에 차곡차곡 쟁여두려고 하는 것일까  

 

서서 내리던 빗줄기는

왜 봉숭아 앞에 와서 얌전하게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일까

빗줄기는 왜 결절도 없이

귀걸이에서 튀어오른 흙탕물을

빗방울의 혀로 자분자분 핥아내게 하는 것일까 

 

이 미칠 것 같은 궁금증을 내려놓기 싫어

나는 저녁을 몸으로 받아들이네 

 

봉숭아와 나 사이에,

다만 희미해서 좋은 당신과 나 사이에,

저녁의 제일 어여쁜 새끼들인 어스름을 데려와 밥을 먹이네 *

 

* 안도현시집[북항]-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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