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화꽃 그늘과 쥐수염붓 - 안도현
국화꽃 그늘이 분(盆)마다 쌓여 있는 걸 내심 아까워하고 있었다
하루는 쥐수염으로 만든 붓으로 그늘을 쓸어 담다가
저녁 무렵 담 너머 지나가던 노인 두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한 사람이 국화꽃 그늘을 얼마를 주면 팔 수 있느냐고 물었다
또 한 사람은 붓을 팔 의향이 없냐고 흥정을 붙였다
나는 다만 백년을 쓸어 모아도 채 한 홉을 모을 수 없는 국화꽃 그늘과
쥐의 수염과 흰 토끼털을 섞어 만든 붓의 내력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 대신 구워서 말려놓은 박쥐 몇 마리와 박쥐의 똥 한 홉,
게으른 개의 귓속에만 숨어 사는 잘 마른 일곱 마리의 파리,
입동 무렵 해 뜨기 전에 채취한 뽕잎 일백이십 장, 그리고
술에 담가놓았다가 볶아 가루로 만든 깽깽이풀뿌리를 내어놓았다
두 노인은 그것들을 한번 내려다보더니 자신들은 약재상(藥材商)이 아니라 했다
그러고는 바삭바삭 소리가 날 것 같은 국화꽃 그늘에 귀를 대보고
쥐수염붓을 오래 만지작거리더니 가을볕처럼 총총 사라졌다
그렇게 옛적 시인들이 나를 슬그머니 찾아온 적이 있었다 *
* 안도현시집[북항]-문학동네
* 모과나무
모과나무가 한사코 서서 비를 맞는다
빗물이 어깨를 적시고 팔뚝을 적시고 아랫도리까지
번들거리며 흘러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비를 맞는다, 모과나무
저놈이 도대체 왜 저러나?
갈아입을 팬티도 없는 것이 무얼 믿고 저러나?
나는 처마 밑에서 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모과나무, 그가 가늘디가는 가지 끝으로
푸른 모과 몇 개를 움켜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끝까지, 바로 그것, 그 푸른 것만 아니었다면
그도 벌써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왔을 것이다 *
* 염소의 저녁
할머니가 말뚝에 매어 놓은 염소를 모시러 간다.
햇빛이 염소 꼬랑지에 매달려
짧아지는 저녁,
제 뿔로 하루 종일 들이받아서
하늘이 붉게 멍든 거라고
염소는 앞다리에 한 번 더 힘을 준다
그러자 등 굽은 할머니 아랫배 쪽에
어둠의 주름이 깊어진다.
할머니가 잡고 있는 따뜻한 줄이 식기 전에
뿔 없는 할머니를 모시고 어서 집으로 가야겠다고
염소는 생각한다. *
* 준다는 것
이 지상에서 우리가 가진 것이
빈손밖에 없다 할지라도
우리가 서로 바라보는 동안은
나 무엇 하나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대 손등 위에 처음으로
떨리는 내 손을 포개어 얹은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스스럼없이 준다는 것
그것은
빼앗는 것보다 괴롭고 힘든 일입니다
이 지상에서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
그것은
세상 전체를 소유하는 것보다
부끄럽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대여
가진것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줄 것이 없어
마음 아파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누구에게 준
넉넉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 수제비
비 온다
찬 없다//
온다간다 말없다//
처마 끝엔 낙숫물
헛발 짚는 낙숫물//
개구리들 밥상가에
왁자하게 울건 말건
밀가루반죽 치대는
조강치처 손바닥
하얗게 쇠든 말든//
섰다 패를 돌리는
저녁 빗소리 *
* 독거(獨居)
나는 능선을 타고 앉은 저 구름의 독거(獨居)를 사랑하련다//
염소떼처럼 풀 뜯는 시늉을 하는 것과 흰 수염을 길렀다는 것이 구름의 흠이긴 하지만,//
잠시 전투기를 과자처럼 깨물어먹다가 뱉으며, 너무 딱딱하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썩 좋아하고//
그가 저수지의 빈 술잔을 채워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것도 좋아한다, 떠나고 싶을 때 능선의 옆구리를 발로 툭 차버리고 떠나는 것도 좋아한다.//
이 세상의 방명록에 이름 석 자 적는 것을 한사코 싫어하는,//
무엇보다 위로 치솟지 아니하며 옆으로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대통령도 수도승도 아니어서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저 구름,//
보아라, 백로 한 마리가 천천히 허공이 될 때까지 허공이 더 천천히 저녁 어스름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기만 하는//
저 구름은, 바라보는 일이 직업이다//
혼자 울어보지도 못하고 혼자 밤을 새보지도 못하고 혼자 죽어보지도 못한 나는 그래서 끝끝내,//
저 구름의 독거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 금강하구에서
시도 사랑도 안 되는 날에는
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보아라
강물이 어떻게 모여 꿈틀대며 흘러 왔는지를
푸른 멍이 들도록
제 몸에다 채찍 휘둘러
얼마나 힘겨운 노동과 학습 끝에
스스로 깊어졌는지를
내 쓸쓸한 친구야
금강 하구둑 저녁에 알게 되리
이쪽도 저쪽도 없이
와와 하나로 부둥켜 안고
마침내 유장한 사내로 다시 태어나
서해 속으로 발목을 밀어 넣는 강물은
반역이 사랑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을
한꺼번에 보여줄 테니까
장항제련소 굴뚝 아래까지 따라온 산줄기를
물결로 어루만져 돌려보내고
허리에 옷자락을 당겨 감으며
성큼 강물은 떠나가리라
시도 사랑도 안 되는 날에는
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보아라
해는 저물어가도 끝없이
영차영차 뒤이어 와 기쁜 바다가 되는 강물을
하루내 갈대로 서서 바라보아도 좋으리
* 양철지붕에 대해서
양철지붕이 그렁거리다, 라고 쓰면
그럼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랜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
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깐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게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도 녹슬어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 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는 않겠다, 라든지
그래, 우리 사이에는 은유가 좀 필요한 것 아니냐?
생각해봐
한쪽 면이 뜨거워지면
그 뒷면도 함께 뜨거워지는 게 양철 지붕이란다
* 안도현시집[바닷가 우체국]-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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