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 도종환

효림♡ 2011. 9. 8. 09:44

*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 도종환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

 

* 한송이 꽃

이른 봄에 핀

한송이 꽃은

하나의 물음표다

 

당신도 이렇게  

피어 있느냐고

묻는 *

 

* 풍경

이름 없는 언덕에 기대어 한 세월 살았네
한 해에 절반쯤은 황량한 풍경과 살았네
꽃은 왔다가 순식간에 가버리고
특별할 게 없는 날이 오래 곁에 있었네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풍경을 견딜 수 있었을까
특별하지 않은 세월을 특별히 사랑하지 않았다면
저렇게 많은 들꽃 중에 한 송이 꽃일 뿐인
너를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

 

* 은은함에 대하여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아련한 향기가 스미어 있다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살구꽃 위에 내린

맑고 환한 빛이 들어 있다

강물도 저녁햇살을 안고 천천히 내려갈 땐

은은하게 몸을 움직인다

달빛도 벌레를 재워주는 나뭇잎 위를 건너갈 땐

은은한 걸음으로 간다

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도 순한 얼굴로 돌아온다

봄에 피는 꽃 중에는 은은한 꽃들이 많다

은은함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꽃길을 따라

우리의 남은 생도 그런 빛깔로 흘러갈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의 손 잡고  은은하게 물들어갈 수 있다면 *

 

* 별 하나   

흐린 차창 밖으로 별 하나가 따라온다

참 오래되었다 저 별이 내 주위를 맴돈 지

돌아보면 문득 저 별이 있다

내가 별을 떠날 때가 있어도

별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저 별처럼 있고 싶다

상처받고 돌아오는 밤길

돌아보면 문득 거기 있는 별 하나

괜찮다고 나는 네 편이라고

이마를 씻어주는 별 하나

이만치의 거리에서 손 흔들어주는

따뜻한 눈빛으로 있고 싶다 *

 

* 나무들

바람이 분다 나무들이

비탈에 서서 흔들리고 있다

많은 나무들이 주목받지 못하는 곳에서

혼자씩 젖고 있다

천둥과 번개의 두려운 시간도 똑같이 견디고

목숨의 뿌리가 뽑혀나갈 것 같은 바람과

허리까지 퍼붓는  눈을

고스란히 맞아야 하는 날도 해마다 찾아온다

우리보다 더 먼저 폭염의 햇살에 찔리고 

더 오래 빗줄기에 젖는다

도시로 불려간 몇몇 나무들 빼고는

많은 나무들이 가파른 곳에 뿌리내리고 산다

그러나 그곳이 골짜기든 벼랑이든 등성이든

나무는 제가 사는 곳을 말없이 제 삶의

중심으로 바꿀 줄 안다

별들이 제가 있는 곳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듯

그래서 늘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을 지니고 있듯

나무들도 빛나는 나뭇잎 얼굴을 반짝이며

무슨 신호인가를 하늘로 올려보내며

거기 그렇게 출렁이며 살아 있다 *

 

* 도종환시집[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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