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나무에 기대어 - 도종환

효림♡ 2011. 10. 9. 09:38

* 나무에 기대어 - 도종환 

나무야 네게 기댄다

오늘도 너무 많은 곳을 헤맸고

많은 이들 사이를 지나왔으나

기댈 사람 없었다

네 그림자에 몸을 숨기게 해다오

네 뒤에 잠시만 등을 기대게 해다오

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왔다는 걸 안다

네 푸른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잠시만 눈을 감고 있게 해다오

나무야 이 넓은 세상에서

네게 기대야 하는 이 순간을 용서해다오

용서해다오 상처 많은 영혼을 *

 

* 하현 

반쪽 달빛으로도 뜰이 환하다

산딸나무 흰 잎이 달빛으로 더욱 희게 빛나서

산짐승들 길 찾기 어렵지 않겠다

중국에서 왔다는 발효차 달여 마시며

고적(孤寂)의 뒤를 따라오는 호젓함을 바라본다

숲의 새들도 고요의 죽지에 몸을 묻고

입술을 닫은 한밤중

잔별 몇개 따라나와

밤의 한 귀퉁이 조금 더 윤이 나는데

남은 몇모금의 환한 시간을 아껴 마시며

반쯤 저문 달 바라본다

 

저물 날만 남았어도 환하다는 것이 고맙다 *

 

* 막차

오늘도 막차처럼 돌아온다

희미한 불빛으로 발등을 밝히며 돌아온다

내 안에도 기울어진 등받이에 몸 기댄 채

지친 속도에 몸 맡긴 이와

달아올랐던 얼굴 차창에 식히며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는 이 하나

내 안에도 눈꺼풀은 한없이 허물어지는데

가끔씩 눈 들어 어두운 창밖을 응시하는

승객 몇이 함께 실려 돌아온다

오늘도 많이 덜컹거렸다

급제동을 걸어 충돌을 피한 골목도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넘어온 시간도 있었다

그 하루치의 아슬아슬함 위로

초가을바람이 분다 *

 

* 노루잠

  노루잠이 들었다 깨니 저녁이었다 추녀 밑에서 흐린 물감을 풀어 천천히 하늘을 손질하며 오늘 하루도 문 닫을 채비를 하는 게 보였다 치근덕대며 나를 따라다니던 비루한 욕망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로 인해 몸도 자주 피곤하였다 그 비루함으로 어떤 때는 발걸음에 힘이 들어가고 옆 의자에 앉은 이가 예뻐 보이기도 한다는, 이 부인할 수 없는 목소리를 어떤 날은 내치고 어떤 날은 은근히 기다리며 구두 끝에 묻은 흙을 털기도 하다가 어느새 동무가 되었다
  쪽잠이 든 사이 낮술에 취한 듯한 시간이 가고 그도 다른 일거리를 찾아 슬그머니 나를 빠져나가고 오랜만에 혼자가 되었다 저녁 무렵 혼자 되니 이것도 참 좋다 가만히 있는 허술한 몸을 바람이 발길로 툭툭 건드려보다가 간다 *

 

* 통영 
  당포 앞 바다는 나전칠기 빛이었다 돌벅수 돌이 저물면서도 전복껍질처럼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장승이지만 입술 오목하게 오므리고 웃는 눈자위가 순해서 좋았다


  섬 사이로 또 섬이 있었다 굳이 외롭다고 말하는 섬은 없었다 금이 가지 않은 바위는 없었다

그렇다고 상처를 특별히 내세우는 벼랑은 없었다 전란도 있고 함정도 있고 곡절 많은 날들도 있었지만 그게 세월이었다

 윤이상도 이중섭도 그걸 보고 갔을 것이다 그들이 바라보았을 저녁바다를 나도 망연히 바라본다

통영에는 갯벌이 없다 바위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많이 움직여야 먹이를 구할 수 있는 건 어류들만이 아니었다

 통영에 다녀온 뒤로는 해수욕장이 있는 늘씬한 해안보다 고깃배가 달각달각 모여 있는 바닷가 마을이 좋았다

밀려오는 바다 밀려가는 세월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누워있는 섬들이 나는 좋았다 *

 

* 도종환시집[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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