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바람이 분다, 떠나고 싶다 - 도종환

효림♡ 2011. 8. 8. 09:19

* 바람이 분다, 떠나고 싶다 

"바람이 분다, 떠나고 싶다." 그렇게 허공에 씁니다.  
가을바람이 내 옆에 와 살을 천천히 쓰다듬는 게 느껴진다. 소슬한 가을바람을 앞세우고 떠나고 싶습니다.

발레리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이렇게 말했지만 그런 말이 입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해변으로 가고 싶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사막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떠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모래도시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벗어나고 싶습니다. 파도치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숲 우거진 그늘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나무 아래 진종일 누워 있고 싶습니다.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나무의 그림자나 비릿한 물 냄새를 덮은 채 누워 잠들고 싶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에 둘러 싸여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 모를 때면 벗어나고 싶습니다. 빈 몸으로 훌쩍 떠나고 싶습니다.

모르는 사람들, 낯선 풍경들 속에 들어가 이방인처럼 떠돌고 싶습니다. 참을 수 없을 때는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지워져

버리고 싶습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것들을 모두 반납하고 홀가분한 몸으로 문을 나오고 싶습니다.

그때도 그랬습니다. 군에 입대하기 이틀 전 나는 무작정 경부선 열차를 탔습니다. 혼자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군대에 가기 전에 애인과 마지막 며칠을 보낸다는데 나는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소주 한 병을 사서 주머니에 넣고 열차를 탔습니다. 나를 스쳐 지나가며 빠르게 사라지는 차창 밖의 풍경들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습니다. 과거를 향해 천천히 되감기는 풍경들을 떠올리며 말없이 술을 마셨습니다. 검표원이 다가와서 표를 보자고 하는데 주머니에선 술병만 나오고 아무리 뒤져도 표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표를 사서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어디서 빠졌는지 주머니에 열차표는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종착역까지 그냥 갔습니다.

 

종착역에 내려서는 어디로 가겠다는 목표도 없었습니다. 목표가 없는 그것이 좋았습니다.

목적지를 버리고 그냥 여기저기를 걷는 게 좋았습니다. 어둠과 흥청거리는 불빛의 거리를 지향 없이 걸었습니다.

이름표도 일터도 직책도 없이 낯선 얼굴이 되어 걷는 게 좋았습니다. 그 낯설음과 객창감과 소외감을 끌어안은 채

허름한 여관에 허리를 눕히고 혼자 자는 적막한 일박이 좋았습니다.

그러다 갈대가 보고 싶었습니다. 을숙도를 찾아갔습니다.

갈대숲 사이에 앉아 "갈밭이여 너도 한 잔 하거라, 숨어 사는 새들이여 너도 한 잔 하거라, 갈대숲 사이에 앉아 머리 풀고

우는 사람이여 당신도 한 잔 하거라." 그렇게 말하면서 혼자 마시는 낮술이 좋았습니다.

그동안 내가 쌓은 것 내가 가진 것 그것들을 다 반납하고 간다고 생각하며 홀가분해지려고 애썼습니다.

내 앞에는 더 크고 낯선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늘 낯선 세계와 마주한다는 것입니다. 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다시 시작할 때마다 낯선 세상과 처음 인사를 주고받으며 조금씩 서로를 익혀 간다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길이라는 걸 생각하였습니다. 익숙한 곳에서만 깃들어 살면 편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생을 살 수 없습니다. 버리고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거듭 날 수 없습니다.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과 만나지 못합니다.

바람만 불면 떠나고 싶고 과꽃이나 억새풀만 흔들려도 함께 흔들리며 떠나고 싶어지는 것도

그런 새로운 것과 만나고 싶은 열망 때문일 것입니다. 어디선가 억새풀이 무더기로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못 견디게 떠나고 싶고, 어디선가 강물이 저 혼자 가을 깊은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달려가고 싶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

 

*도종환의 산에서 보내는 편지[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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