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담쟁이 - 도종환

효림♡ 2011. 5. 25. 08:29

 

*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 담쟁이 - 황인숙 

눈을 감고 담쟁이는
한껏 사지를 뻗고 담쟁이는
온몸으로 모든 걸 음미한다
달콤함, 부드러움, 축축함, 서늘함,
살랑거림, 쓸쓸함, 따분함, 고요함,
따사로움, 메마름, 간지러움, 즐거움,

담쟁이는 눈을 감고
온몸으로 음미하는 모든 것에
더듬더듬 작은 음표들을 토해 낸다

담쟁이는 여전히 눈을 감고
흥얼거린다
담쟁이의 선율로 뒤덮인
커다란 악보에 시월도 저물 때. *

 

* 빨간 담쟁이덩굴 - 정현종 

어느새 담쟁이덩굴이 붉게 물들었다!
살 만하지 않은가, 내 심장은
빨간 담쟁이덩굴과 함께 두근거리니!
석류, 사과 그리고 모든 불꽃들의
빨간 정령들이 몰려와
저렇게 물을 들이고,
세상의 모든 심장의 정령들이
한꺼번에 스며들어
시간의 정령, 변화의 정령,
바람의 정령들과 함께 잎을 흔들며
저렇게 물을 들여 놓았으니,
살 만하지 않은가, 빨간 담쟁이덩굴이여,
세상의 심장이여,
오 나의 심장이여. *

 

* 담쟁이덩굴의 승리 - 김광규  

   대추나무와 후박나무, 단풍나무와 감나무가 몇 십 년 동안 뿌리 내리고 자라뒤뜰 장독대 근처에, 담쟁이덩굴이 느릿느릿 기어왔습니다. 벽돌담보다 더 높이 자라서 제각기 품위를 뽐내는 큰 키 나무들이 담쟁이덩굴을 측은하게 내려다보았습니다. 뱀처럼 땅바닥이나 담벼락을 기어다니고, 혼자서 똑바로 설 수 없는 담쟁이가 불쌍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담쟁이에게는 자기가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한곳에서 평생을 살고 있는 큰 키 나무들의 영역, 뒤뜰을 떠나서 벽돌담을 타고 넓은 앞마당을 지나서, 대문을 넘어서 집 밖으로 나가보려는 소망이지요.

   뒤뜰 벽돌담으로 기어올라간 담쟁이는 덩굴손의 빨판으로 벽돌 사이의 홈을 단단히 붙들고, 조금씩 앞으로 나가기 시작합니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달리 담쟁이덩굴은 자꾸만 아래로 늘어집니다. 벽면에 붙어서 지나가려니까, 중력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지요.

장독대와 앞마당 대문 사이의 벽돌담 중간지점까지 완만한 하강곡선을 그리며 밑으로 처져 내려온 담쟁이는 땅바닥에 닿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서 머리를 쳐들었습니다. 그리고 차츰 상승곡선을 그리며 위쪽으로 기어올라갑니다.

   온갖 안간힘 끝에 담쟁이덩굴은 마침내 앞마당 대문 지붕 위에 도달했습니다. 그동안 삼 년의 세월이 흘러갔고, 붉은 벽돌담 한가운데 담쟁이 줄기가 갈색의 현수선을 굵직하게 남겨놓았습니다. 뒤뜰의 큰 키 나무들이 지붕 위에 올라온 담쟁이덩굴에게 부러운 경탄의 몸짓을 바람에 실어 보냅니다.

   하늘을 향해서 우뚝우뚝 선 이 고고한 큰 키 나무들과 달리, 담쟁이덩굴은 느린 속도로 넓게 퍼져가면서, 모든 땅과 벽과 지붕을 남김없이 뒤덮고, 결국 온 동네를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 

* 김광규시집[시간의 부드러운 손]-문지   

 

 

* 담쟁이넝쿨 - 김진광 

무척 궁금한가 봐 

누구한테서

편지가 왔는지. 

 

담쟁이넝쿨이 

달돋음으로 

대문의 편지통을 

들여다보고 있다. 

 

일 학년 아이들처럼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글자를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