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미황사 편지 - 도종환

효림♡ 2011. 5. 21. 10:22

* 미황사 편지 - 도종환   

 

집 나온 지 아흐레가 되었습니다 
새벽예불을 마칠 때가 되어서야
소쩍새도 울음을 그쳤습니다
삼경에서 새벽까지 우는 밤새도
풀리지 않는 번뇌가 있는 걸까요
동쪽 봉우리 위에 뜬 북두칠성이
바다 쪽으로 발을 뻗을 때까지 뒤척이는 별들은
무슨 고뇌를 안고 골똘히 밤을 지새는걸까요
금강스님은 동백나무를 보며
그늘에서 자라는 동백은 사월이 갈 때까지도
붉게 핀다 하셨지요
빛을 빼앗기고 억센 참나무 둥치에 시달리며
자라는 동안 긴장을 늦추지 않는 치열한 정신이
뜨겁고 고운 꽃을 오래 피우는 거겠지요
그러나 저는 시련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저는 지금 소멸과 빛에 대해 말하려는 겁니다
사람답게 사는 빛의 길을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답게 사는 일과 같은 굵기로 꼬인
번뇌의 억센 동아줄에 몸이 묶여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모순과 싸워 이긴 날들의 업적과
똑같은 크기로 쌓이는 이 업은 또 어이해야 합니까
그물과 나와 세상이 함께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짐승의 우리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쳐왔습니다 그러나
세월 흘러도 핏자국은 왜 지워지지 않는 겁니까
빛이 보이는 곳을 향해
이렇게 많은 산을 넘어왔는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지 않는 까닭은
어디에 있습니까
달마산 바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봅니다
오늘도 저 숲과 나무들은 온종일
바람에 시달릴 것입니다
어떤 나무들은 허리가 휘기도 하고
나 같은 나무들은 이파리를 매단 관절 마디마디가
바늘로 찌를 듯이 아플 것입니다
언제쯤 무명의 밤이 지나고
적멸의 새벽을 맞이하게 될까요
새도 달마산도 별도 사람도 맑고 고요해져
자기 자리를 찾아가게 될까요
그대 먼저 길을 찾아가시면
부디 발자국 하나라도 남겨주세요
그대 발에 밟혔다 누운 풀잎을 흔들며
그 뒤를 따르겠습니다
버드나무 씨앗처럼 가벼워져서
골짜기 물처럼 알몸으로 투명해져서 *

 

* 도종환시집[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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