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퇴계의 편지 - 도종환

효림♡ 2011. 5. 24. 08:59

* 퇴계의 편지 - 도종환

 

일찍이 저보(邸報)를 보고서

고비(皐比)를 걷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믐께 남쪽으로 돌아가기를 정했다니

축하할 일입니다

저는 지난해 돌아와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글을 올려

이 소원 이루어지면

산은 더욱 깊어지고 물은 더욱 멀어지며

글은 더욱 맛나고 가난은 더욱 즐거울 것입니다

나아감과 물러남에 구차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만 깨끗하고자 의리를 어지럽혀선 안 되지만

의를 잊고 벼슬만 좇아서도 안 된다 하였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며

때를 만나기도 하고 만나지 못하기도 하지만

몸을 깨끗이하고 의를 행할 뿐이지

화복을 논할 바 아닙니다

다만 학문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자신을 높이고

시대를 헤아리지 못했으면서

세상을 일구는 데 용감했던 것이 실패한 까닭이니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언제나 빼앗을 수 없는 의지와

꺾을 수 없는 기개 속일 수 없는 식견을 지니고

담금질해 발뒤꿈치 땅에 단단히 붙어

허명과 이익과 위세에 넘어가지 않길 바랍니다

원컨대 밝은 덕 높이는 노력을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하기로 약속합시다

삼가 편지를 올려 이별을 대신합니다

경오** 맹춘 스무나흘 황은 머리를 숙입니다 *

 

*고비를 걷었다는 건 스승의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성균관 대사성의 직분에서 물러났음을 가리킨다.

**경오년은 1570년 선조 3년이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는 고봉 기대승에게 쓴 편지이며 황은 퇴계 선생 자신의 이름이다.

* 도종환시집[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