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계의 편지 - 도종환
일찍이 저보(邸報)를 보고서
고비(皐比)를 걷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믐께 남쪽으로 돌아가기를 정했다니
축하할 일입니다
저는 지난해 돌아와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글을 올려
이 소원 이루어지면
산은 더욱 깊어지고 물은 더욱 멀어지며
글은 더욱 맛나고 가난은 더욱 즐거울 것입니다
나아감과 물러남에 구차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만 깨끗하고자 의리를 어지럽혀선 안 되지만
의를 잊고 벼슬만 좇아서도 안 된다 하였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며
때를 만나기도 하고 만나지 못하기도 하지만
몸을 깨끗이하고 의를 행할 뿐이지
화복을 논할 바 아닙니다
다만 학문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자신을 높이고
시대를 헤아리지 못했으면서
세상을 일구는 데 용감했던 것이 실패한 까닭이니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언제나 빼앗을 수 없는 의지와
꺾을 수 없는 기개 속일 수 없는 식견을 지니고
담금질해 발뒤꿈치 땅에 단단히 붙어
허명과 이익과 위세에 넘어가지 않길 바랍니다
원컨대 밝은 덕 높이는 노력을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하기로 약속합시다
삼가 편지를 올려 이별을 대신합니다
경오** 맹춘 스무나흘 황은 머리를 숙입니다 *
*고비를 걷었다는 건 스승의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성균관 대사성의 직분에서 물러났음을 가리킨다.
**경오년은 1570년 선조 3년이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는 고봉 기대승에게 쓴 편지이며 황은 퇴계 선생 자신의 이름이다.
* 도종환시집[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도종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으로 하는 일곱 가지 보시 - 도종환 (0) | 2011.08.08 |
---|---|
담쟁이 - 도종환 (0) | 2011.05.25 |
미황사 편지 - 도종환 (0) | 2011.05.21 |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 도종환 (0) | 2011.03.15 |
부드러운 직선 - 도종환 (0) | 2011.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