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애월(涯月)에서 - 이대흠

효림♡ 2011. 11. 14. 09:10

* 애월(涯月)에서 - 이대흠 

당신의 발길이 끊어지고부터 달의 빛나지 않는 부분을 오래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무른 마음은 초름한 꽃만 보아도 시려옵니다

마음 그림자 같은 달의 표면에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발자국이 있을까요

파도는 제 몸의 마려움을 밀어내며 먼 곳에서 옵니다 항구에는 지친 배들이 서로의
몸을 빌려 울어댑니다

살 그리운 몸은 불 닿은 노래기처럼 안으로만 파고듭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불빛도 물에 발을 들여놓으면 초가집 모서리처럼 순해집니다 먼 곳에서
온 달빛이 물을 만나 문자가 됩니다

가장 깊이 기록되는 달의 문장을 어둠에 눅은 나는 읽을 수 없습니다

달의 난간에 마음을 두고 오늘도 마음 밖을 다니는 발걸음만 분주합니다 *

 

* 귀가 서럽다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을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귀가 서럽네 *

 

* 아름다운 위반 

기사 양반! 저짝으로 조깐 돌아서 갑시다

어칳게 그런다요 뻐스가 머 택신지 아요?

아따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제

쓰잘데기 읎는 소리 하지 마시오

저번챀에 기사는 돌아가듬마는...

그 기사가 미쳤능갑소

 

노인네가 갈수록 눈이 어둡당께

저번챀에도

내가 모셔다드렸는디 *

 

* 별의 문장 
서늘하고 구름 없는 밤입니다 별을 보다가 문득 하늘에 돋은 별들이 점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너무 많은 이들이 더듬어 저리 반짝이는 것이겠지요

사랑에 눈먼 나는 한참 동안 별자리를 더텼습니다 나는 두려움을 읽었는데 당신은 무
엇을 보았는지요

은행나무 잎새 사이로 별들은 또 자리를 바꿉니다 *

 

* 비가 오신다

서울이나 광주에서는

비가 온다는 말의 뜻을

알 수가 없다

비가 온다는 말은

장흥이나 강진 그도 아니면

구강포를 가야 이해가 된다

내리는 비야 내리는 비이지만 비가

걸어서 오거나  달려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어떨 때 비는 싸우러 오는 병사처럼

씩씩거리며  다가오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그 병사의 아내가

지아비를 전쟁터에 보내고 돌아서서

골목길을 걸어오는

그 터벅거림으로 온다

그리고 또 어떨 때는

새색시 기다리는 신랑처럼

풀 나무 입술이 보타 있을 때

산모롱이에 얼비치는 진달래 치마로

멀미나는 꽃내를

몰고 오시기도 하는 것이다 *

 

* 외꽃 피었다     

꽃과 가시가 한 어원에서 비롯되었다는 글을 읽는 동안

지금은 다른 몸이 한몸에서 갈라져나온 시간을 생각하는 동안

꽃을 사랑하는 일은 결국 가시를 품는 것이라는 것을 새기는 동안

 

꽃이 오셨다

 

어쩌지 못하고 물외처럼 순해지며 아픈 내 마음이며

줄기와 잎이 가시로 덮였어도 외꽃처럼 고울 그대에 대한 생각이며

견디지 못할 것 같았던 몸의 그리움을 마음의 그늘로 염하는 시간이며 *

 

 

* 이대흠시집[귀가 서럽다]-창비,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