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저녁숲 -스콧 니어링을 그리며 - 도종환

효림♡ 2012. 1. 6. 14:36

* 저녁숲 -스콧 니어링을 그리며 - 도종환  

 

모란꽃도 천천히 몸을 닫는 저녁입니다

같은 소리로 우는 새들이 서로 부르며

나뭇가지에 깃드는 걸 보며 도끼질을 멈춥니다

숲도 오늘은 여기쯤에서

마지막 향기를 거두어들이는 시간엔

나무 쪼개지는 소리가 어제 심은 강낭콩과 감자에게도

다람쥐와 고라니에게도 편하지 않을 듯 싶습니다

흩어진 장작을 추녀 밑에 가지런히 쌓으며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주류사회에서 두 번씩이나 쫓겨난 뒤

버몬트 숲속으로 들어갈 때는

진보에 대한 희망도 길도 잃었고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지만

그 대신 거대한 광기와 파괴와 황폐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흐르는 물에 이마를 씻고

바위 위에 앉아 생각해보니  

당신처럼 오늘 하루 노동하고 읽고 쓰고

자연과 사람의 좋은 만남을 가지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나무토막과 잔가지들을

차곡차곡 쌓듯 내 삶도 이제는

흐트러지지 않고 질서가 잡힐 것이며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천천히 그리고 간소하게 저녁을 맞이할 것입니다

어둠이 숲과 계곡을 덮어오자

땅 위에 있는 풀과 나무들이 일제히 별을 향해

손을 모읍니다

우리 모두 똑같은 생명을 지닌 한 가족이며

크고 완전하고 넓은 우주의 품에 들어

넉넉하고 평온해지기를 소망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오늘 밤은 아직 구름에 가린 별들이 많고

내 마음에도 밤안개 다 걷히지 않았지만

점차 간결한 삶의 단순성에 익숙해지고

일관성을 잃지 않으며  

내 눈동자가 우주의 빛을 되찾으면

별들이 이 골짜기에 가득가득 몰려올 것임을 믿습니다

내 안에 가득 차 있던 것들 중에

빠져나갈 것은 빠져나가고

제자리로 돌아올 것은 돌아와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얼굴도 웃음도 제 본래 모습을 되찾고

의로움도 선함도 몸속에서 원융하여

당신처럼 균형잡힌 인격이 되어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여름 산도 가을 숲도 다 기뻐할 것입니다

생의 후반에 당신을 알게 되어서 기쁩니다

생사의 바다를 건넌 곳에서도 평안하시길 빕니다

숲속에서도 별 밭에서도 늘

완성을 향해 가고 있을 당신을 그리며  

 

* 도종환시집[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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