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범종 소리 - 도종환

효림♡ 2012. 3. 7. 08:22

* 범종 소리 - 도종환

범종 소리에도 빛깔이 있다면 맑은 청동빛은 아닐까요

가수리에서 이제 막 동강으로 들어서며 서서히 넓어지는 지장천 저녁 물소리 그런 노을 물든 빛깔은 아닐까요

납의를 걸친 내세불의 유려한 어깨 곡선을 따라 흘러 내리다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손끝을 떠나 홀연 허공으로

나서는 목소리 옳거든 두려워 말라 그런 음성의 나직하고 포근한 빛깔은 아닐까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발길 돌려 어느 절에 들었는데요 늪에서 건져낸 그 절 미륵부처님 얼굴에 근심

가득서려 있는 걸 보고 마음 안 좋았는데요 그때 저녁 범종소릴 들었어요

종소리 울려퍼지는 동안 나는 내가 열다섯 까까머리 소년이던 무렵 옛 용화사 범종 앞에 앉아서

오후 내내 화폭에 범종을 옮겨 그리던 날이 생각났어요 상대와 하대의 화려한 꽃무늬를 그리고

종의 젖꼭지와 하늘을 날아오르면서 곱게 꿇은 두 무릎 펴지 않은 비천상을 그리며 복숭앗빛 엷은

저녁노을 아래서 나는 잠시 황홀했었는데요

스무 살 다 가도록 산으로 들어가고 싶은 꿈 끝내 못 이루고 그만 서른 고개 넘기며 삼악도 같은 세상에

때론 광목천왕(廣目天王)처럼 눈 부릅뜨고 소리도 지르며 사는 동안 나는 범종을 속 깊이 감추었지요

내가 그리고자 하는 범종은 아름다우나 당좌를 쳐도 소리가 나지 않을 것 같아서였어요

오늘 저녁 범종 소리가 나를 이리로 오게 한 연유를 생각하면서 종소리 속에서 내가 다시 들어야 할 소리를

생각하면서 범종루 아래에 발이 붙은 채 범종 소리가 소리의 끝을 물고 날아가는 서쪽 하늘 바라보았는데요

그때 먼 옛날 내가 그려넣지 못한 범종 소리가 산허리를 감도는 저녁 연기처럼 먼 곳으로부터 내게로 다가오는 게 보였어요

그 소리를 보다가 맑지만 여리지 않은 소리 혼자 울리지만 늘 여럿이 있는 쪽을 향해 가는 범종 소리의 연한 청동빛을 떠올렸는데요  다른 이들이 받는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는 동안 더 깊이 울려오는 소리의 빛깔을 *

 

* 도종환시집[슬픔의 뿌리]-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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