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 - 도종환
제가 그 산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널리 퍼진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이름대로 그 산의 풍채는 멀리서도 기품이 있었고
능선을 타고 자란 나무들 뒤로 구름이 모여와줄 때나
산의 목소리를 따라 햇살이 줄을 지어 내려올 때면
거기 모인 이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산의 음성을 듣곤했습니다
누구나 산의 얼굴을 좀더 가까이 보고 싶어했고
가까운 발치까지 가 그가 마련한 작은 나무 한그루
돌 몇개를 얻어 뜨락까지 가지고 와
자랑스러운 듯 매만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산을 멀리하게 된 것은 그를 자주 대하면서였습니다
저 혼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늘 그 곁에 모이는게 싫었고
함께 있으면서 그윽하던 골짜기 사이로
흉터와 그늘진 곳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빗줄기에 허물어진 옆구리 뇌성과 벽력 앞에서
어떤 때는 나약해 보이는 어깨가 저를 실망스럽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를 칭송하던 소리들이
쓰레기와 휴지더미가 되어 그에게 날아가고
그도 지친 듯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모습에 저는 그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다시 이름높은 다른 산들을 찾아 떠돌기를 여러 해
나뭇잎이 지고 새로 돋는 산자락을 따라 스무 해 가까이
저도 조금씩 나이가 들고 세상 거친 바람에
상처를 입은 채 돌아온 그해 겨울
저는 어느 산기슭에 다리를 접고 신발을 벗었습니다
해진 신발이 머문 댓돌 위로 몇날 몇밤 눈보라가 치고
눈 녹는 물소리가 문풍지를 조심조심 건드리는 저녁 토방문을 열다가
저는 조용히 늙어가고 있는 옛날 그 산의 옆모습을 만났습니다
제가 돌아온 곳이 그 산의 어느 품안이었음을 안 것도 그때였습니다
가까이 있어서 귀한 줄 모르던 산이 거기 있었습니다
자주 만날 수 있어서 소중한 줄 모르던 그 산의 골짜기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산은 사랑하는 많은 이를 잃고도
말없이 말없이 산새를 쉬게 하며 조용히 저물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도 상처받고 돌아온 뒤에야 그 산의 모습이 바로 보였습니다
제가 지치고 나약한 모습의 보잘것없는 언덕이 되어
그의 근처를 찾은 것이 아니라
산이 날 그의 가슴 안으로 불러들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일과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어렴풋이 알고 나서야
산이 내 가슴속으로 들어와 나를 산으로 키우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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