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마종기 시 모음 2

효림♡ 2012. 2. 15. 14:20

* 전화 - 마종기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맑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에서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

 

*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아내는 맛있게 끓는 국물에서 며루치를

 하나씩 집어내버렸다. 국물을 다 낸 며루치는

 버려야지요. 볼썽도 없고 맛도 없으니까요.)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뜨겁게 끓던 그 어려운 시대에도

 며루치는 곳곳에서 온몸을 던졌다.

 (며루치는 비명을 쳤겠지. 뜨겁다고,

 숨차다고, 아프다고, 어둡다고, 떼거리로

 잡혀 생으로 말려서 온몸이 여위고

 비틀어진 며루치떼의 비명을 들으면.)

 

 시원하고 맛있는 국물을 마시면서

 이제는 쓸려나간  며루치를 기억하자.

 (남해의 연한 물살, 싱싱하게 헤엄치던

 은빛 비늘의 젊은 며루치떼를 생각하자.

 드디어 그 긴 겨울도 지나고 있다.) *

 

* 비 오는 날

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 당신을.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날 때 
환한 불을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길을 찾고 싶다.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은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 *

 

* 방문객

무거운 문을 여니까

겨울이 와 있었다.

사방에서는 반가운 눈이 내리고

눈송이 사이의 바람들은

빈 나무를 목숨처럼 감싸 안았다.

우리들의 인연도 그렇게 왔다.

 

눈덮힌 흰 나무들이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복잡하고 질긴 길은 지워지고

모든 바다는 해안으로 돌아가고

가볍게 떠올랐던 하늘이

천천히 내려와 땅이 되었다.

 

방문객은 그러나, 언제나 떠난다.

그대가 전하는 평화를

빈 두 손으로 내가 받는다. *

 

* 담쟁이 꽃  

내가 그대를 죄 속에서 만나고
죄 속으로 이제 돌아가느니
아무리 말이 없어도 꽃은
깊은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

죄 없는 땅이 어느 천지에 있던가
죽은 목숨이 몸서리치며 털어버린
핏줄의 모든 값이 산불이 되어
내 몸이 어지럽고 따뜻하구나.

따뜻하구나, 보지도 못하는 그대의 눈.
누가 언제 나는 살고 싶다며
새 가지에 새순을 펼쳐내던가.
무진한 꽃 만들어 장식하던가
또 몸풀 듯 꽃잎 다 날리고
헐벗은 몸으로 작은 열매를 키우던가.

누구에겐가 밀려가며 사는 것도
눈물겨운 우리의 내력이다.
나와 그대의 숨어 있는 뒷일도
꽃잎 타고 가는 저 생의 내력이다. *

 

* 박꽃

그날 밤은 보름달이었다.

건넛집 지붕에는 흰 박꽃이

수없이 펼쳐져 피어 있었다.

한밤의 달빛이 푸른 아우라로

박꽃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ㅡ박꽃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ㅡ네.

아버지 방 툇마루에 앉아서 나눈 한마디,

얼마나 또 오래 서로 딴생각을 하며

박꽃을 보고 꽃의 나머지 이야기를 들었을까.

ㅡ이제 들어가 자려무나.

ㅡ네, 아버지.

문득 돌아본 아버지는 눈물을 닦고 계셨다. 

 

오래 잊었던 그 밤이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내 아이들은 박꽃이 무엇인지 한번 보지도 못하고

하나씩 나이 차서 집을 떠났고

그분의 눈물은 이제야 가슴에 절절이 다가와

떨어져 있는 것이 하나 외롭지 않고

내게는 귀하게만 여겨지네. *


* 이슬의 눈

가을이 첩첩 쌓인 산속에 들어가
빈 접시 하나 손에 들고 섰었습니다.
밤새의 추위를 이겨냈더니
접시 안에 맑은 이슬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슬은 너무 적어서
목마름을 달랠 수는 없었습니다
하룻밤을 더 모으면 이슬이 고일까,
그 이슬의 눈을 며칠이고 보면
맑고 찬 시 한 편 건질 수 있을까,
이유 없는 목마름도 해결할 수 있을까.

다음 날엔 새벽이 오기도 전에
이슬 대신 낙엽 한 장이 어깨에 떨어져
부질없다, 부질없다 소리치는 통에
나까지 어깨 무거워 주저앉았습니다.
이슬은 아침이 되어서야 맑은 눈을 뜨고
간밤의 낙엽을 아껴주었습니다.
ㅡ당신은 그러니, 두 눈을 뜨고 사세요.
앞도 보고 뒤도 보고 위도 보세요.
다 보이지요? 당신이 가고 당신이 옵니다.
당신이 하나씩 다 모일 때까지, 또 그 후에도
눈뜨고 사세요. 바람이나 바다같이요.
바람이나 산이나 바다같이 사는

나는 이슬의 두 눈을 보았습니다. 그후에도

바람의 앞이나 바다의 뒤에서
두 눈 뜬 이슬의 눈을 보았습니다. *

 

* 온유(溫柔)에 대하여  

온유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그 사람 빈집 안의 작은 불꽃이

오늘은 더욱 맑고 섬세하구나.

겨울 아침에 무거운 사람들 모여서

온유의 강을 조용히 건너가느니

주위의 추운 나무들 눈보라 털어내고

눈부신 강의 숨결을 받아 마신다.

 

말과 숨결로 나를 방문한 온유여,

언 손을 여기 얹고 이마 내리노니

시끄러운 사람들의 도시를 지나

님이여 친구가 어깨 떨며 운다.

그 겸손하고 작은 물 내게 묻어와

떠돌던 날의 더운 몸을 씻어준다.

 

하루를 마감하는 내 저녁 속의 노을,

가없는 온유의 강이 큰 힘이라니!

나도 저런 색으로 강해지고 싶었다.

불타는 뜬구름도 하나 외롭지 않구나. *

 

* 마종기시작에세이[당신을 부르며 살았다]-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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