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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서정(夏日抒情) - 오탁번

효림♡ 2012. 8. 13. 09:23

* 하일서정(夏日情) - 오탁번 

혼자 있을 때

내의와 양말을 빨면

환한 바깥에다 내다 걸기 뭣해서

화장실 벽에 숨겨놓듯 걸어놓는다

비알밭 쥐옥수수도

메뚜기처럼 살이 오르는

한여름 어느 날

감곡에서 놀러온 여류시인이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빨래를 걷어서 들고 나온다

-빨래가 햇볕을 못 보면

곰팡이가 슬고 냄새가 나요

잠자리 떼 앉았다가 제풀에 날아오르는

심심한 빨랫줄에다 훨훨 넌다

-햇볕이 너무 좋아서

빨래들이 깔깔깔 웃겠네요

 

햇볕 한 번 받지 못하고

칭얼칭얼 보채던 빨래가

자늑자늑 흔들리는 빨랫줄 위에서

빨주노초파남보 눈부신 햇살을 마시며

깔깔깔 웃는 소리가

그날 낮곁 내내 들려왔다

 

* 설미(雪眉)

하느님이
새참 먹다가
사레라도 들렸는가
감투밥으로 핀
이팝꽃이
막 흩날린다

하느님의
흰 눈썹 같은
해오라기 한 마리
산허리를
가웃가웃 재며
날아간다

* 백두산 천지 

1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가까워 장백소나무 종비나무 자작나무 우거진 원시림 헤치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순례의 한나절에 내 발길 내딛을 자리는 아예 없다 사스레나무도 바람에 넘어져 흰 살결이 시리고 자잘한 산꽃들이

하늘 가까이 기어가다 가까스로 뿌리내린다 속손톱만한 하양 물매화 나비날개인 듯 바람결에 날아가는 노랑 애기금매화

새색시의 연지빛 곤지처럼 수줍게 피어 있는 두메자운이 나의 눈망울 따라 야린 볼 붉히며 눈썹 날린다 무리를 지어

하늘 위로 고사리 손길 흔드는 산미나리아재비 구름국화 산매발톱도 이제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백두산 산마루를

나홀로 이마에 받들면서 드센 바람 속으로 죄지은 듯 숨죽이며 발걸음 옮긴다 

 

2

   솟구쳐 오른 백두산 멧부리들이 온뉘 동안 감싸안은 드넓은 천지가 눈앞에 나타나는 눈깜박할 사이 그 자리에서

나는 그냥 숨이 막힌다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백두산 그리메가 하늘보다 더 푸른 천지에 넉넉한 깃을 드리우고

메꿎은 우레소리 지나간 여름 한나절 아득한 옛 하늘이 내려와 머문 천지 앞에서 내 작은 몸뚱이는 한꺼번에 자취도 없다

내 어린 볼기에 푸른 손자국 남겨 첫 울음 울게 한 어머니의 어머니 쑥냄새 마늘냄새 삼베적삼 서늘한 손길로 손님이 든

내 뜨거운 이마 짚어주던 할머니의 할머니가 백두산 천지 앞에서 무릎 꿇은 나를 하늘눈 뜨고 바라본다

백두산 멧부리가 누리의 첫 새벽 할아버지의 흰 나룻처럼 어렵고 두렵다 

 

3

   하늘과 땅 사이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천지가 그대로 하늘이 되고 구름결이 되어 백두산 산허리마다

까마득하게 푸른하늘 구름바다 거느린다 화산암 돌가루가 하늘 아래로 자꾸만 부스러져내리는 백두산 천지의

낭떠러지 위에서 나도 자잘한 꽃잎이 되어 아스라한 하늘 속으로 흩어져 날아간다 아기집에서 갓 태어난 아기처럼

혼자 울지도 젖을 빨지도 못한다 온가람 즈믄 뫼 비롯하는 백두산 그 하늘에 올라 마침내 바로 서지도 못하고

젖배 곯아 젖니도 제때 나지 못할 내 운명이 새삼 두려워 백두산 흰 멧부리 우러르며 얼름빛 푸른 천지 앞에

숨결도 잊은 채 무릎 꿇는다. *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