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효림♡ 2012. 8. 13. 09:16

*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世上事)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 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 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 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 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 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 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

 

* 형제  
초등학교 1, 2학년 애들이려나
광주시 연제동 연꽃마을 목욕탕ㅡ
키가 큰 여덟 살쯤의 형이란 녀석이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여섯 살쯤 아우를
때밀이용 베드 위에 벌러덩 눕혀 놓고서
엉덩이, 어깨, 발바닥, 배, 사타구니 구석까지
손을 넣어 마치 그의 어미처럼 닦아 주고 있었다
불알 두 쪽도 예쁘게 반짝반짝 닦아주는 것이었다


그게 보기에도 영 좋아 오래도록 바라보던 나는
"형제여! 늙어 죽는 날까지 서로 그렇게 살아라!"
중얼거려 주다가 갑자기 눈물방울을 떨구고 말았다. *

 

* 정월단심(正月丹心)

눈 쌓인 밭에 가서
천지(天地)를 우러렀더니
삼동(三冬) 칼끝 입에 문 마늘촉
매운맛 잃지 않으려 함인지
눈 속에 더 푸르러라. 

 

* 사랑가

사랑이여 세상의 모오든

사랑의 밑바닥 찌꺼기들이여

하염없이 물결치는 잡풀의 넋이여

내 그대들을 밤낮으로 그리다가

그대들의 가슴에 엎어져 울려 하다가

어깨 끝에 손톱이 길어난 줄도 몰랐어라

손톱이 길게 길어난 줄도 모르고

내 그대들의 가슴에 집을 지으려고

머나먼 산천을 헤매었어라.

 

* 콩알 하나

누가 흘렸을까//

막내딸을 찾아가는

다 쭈그러진 시골 할머니의

구멍 난 보따리에서

빠져 떨어졌을까//

역전 광장

아스팔트 위에

밟히며 뒹구는

파아란 콩알 하나//

나는 그 엄청난 생명을 집어들어

도회지 밖으로 나가//

강 건너 밭 이랑에

깊숙이 깊숙이 심어 주었다

그때 사방 팔방에서

저녁노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호남선(湖南線) 
기차는 가고 똥개만 남아 운다
기차는 가고 식은 팥죽만 남아 식는다
기차는 가고 시커멓게 고개를 넘는
깜부기, 깜부기의 대갈통만 남아 벗겨진다
기차는 가는데 빈 지게꾼만 어슬렁거리고
기차는 가는데 잘 배운 놈들은 떠나가는데
못 배운 누이들만 남아 샘물을 긷는데
기차는 가고 아아 기차는 영영 사라져버리고
생솔가지 저녁연기만 허물어진 굴뚝을 뚫고 오르고
술에 취한 홀애비만 육이오의 과부를 어루만지고
농약을 마시고 죽은 머슴이 홀로 죽는다
인정 많은 형님들만 곰보딱지처럼 남아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무덤을 지키며
거머리 우글거린 논바닥에 꼿꼿이 서 있다. *

* 김용택[시가 내게로 왔다2]-마음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