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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속에 호랑이 - 최정례

효림♡ 2012. 9. 19. 08:45

* 햇빛 속에 호랑이 - 최정례

나는 지금 두 손 들고 서 있는 거라

뜨거운 폭탄을 안고 있는 거라


부동자세로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는 거라 빠빳한 수염털 사이로 노랑 이그르한 빨강 아니 초록의 호랑이 눈깔을


햇빛은 광광 내리퍼붓고

아스팔트 너무나 고요한 비명 속에서


노려보고 있었던 거라, 증조할머니 비탈밭에서 호랑이를 만나, 결국 집안을 일으킨 건 여자들인 거라, 머리가 지글거리고 돌밭이 지글거리고, 호랑이 눈깔 타들어가다 못해 슬몃 뒤돌아 가버렸던 거라, 그래 전재산이었던 엇송아지를 지켰고, 할머니 눈물 돌밭에 굴러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그러다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식의 호랑이를 만난 것이라

신호등을 아무리 노려봐도 꽉 막혀서


ㅡ 다리 한 짝 떼어놓으시지

ㅡ 팔도 한 짝 떼어놓으시지


이젠 없다 없다 없다는데도

나는 증조할머니가 아니라 해도


ㅡ 머리통 염통 콩팥 다 내놓으시지

ㅡ 내장도 마저 꺼내 놓으시지


저 햇빛 사나와 햇빛 속에 우글우글

아이구 저 호랑이 새끼들 *

* 최정례시집[햇빛 속에 호랑이]-세계사

 

* 나무가 바람을 
나무가 바람을 당긴다
이 끈을 놓아
이 끈을 놓아
끌려가는 자세로 오히려
나무가 바람을 끌어당길 때
사실 나무는 즐겁다
그 팽팽함이

바람에 놓여난 듯
가벼운 흔들림
때론 고요한 정지
상처의 틈에 새 잎 함께 재우며
나무는 바람을 놓치지 않고
슬며시 당겨 재우고 있다

세상 저편의 바람에게까지
팽팽한 끈 놓지 않고 *

 

* 팔정사 백일홍 

꿈속의 또 꿈속만 같은
눈썹에 불이 붙은 그를 만난 날
그 눈길 받아내지 못하고
흔들리다 잠 깬 날
찬 강물로 달려가
풍덩 몸 던지고 싶던 날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울고 있었다
징징징
징소리가 들렸다
절에 오르는 이가 있었다
절에 올라 무조건 빌어보려는 이가 있었다
벡일홍 꽃잎이 벌어지고 있었다
팔정사 단청 끝이 타고 있었다
꽃밭으로 가 치마폭을 흔들며
늦가을까지 환할까 어쩔가를 묻는 이가 있었다
* 최정례시집[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민음사,1994

 

* 있었다 
지금껏 이것들
쓰려고 했지만 써지지 않았던 것
그에게 가닿기를 바랐지만 닿지 못했던 것
이것들 어떡하나


그는 시 따위를 읽으며
시간을 허비할 사람이 아니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나는 누구란 말인가?
내 육체 속에 숙박하고 있는 이 말들은
터무니없이 귀찮게 구는 이것들은


그는 물결 따라 흐르다 발목에 와 걸리적거리는
지푸라기 같은 것을 걷어내듯이
혀를 차겠지
다시 한 번
나를 수치의 화염에 휩싸이게 하겠지


엎치락뒤치락 둔갑하는 그림자처럼
터벅터벅 뒤쫓아 걷는 사람들도 있겠지
황하의 뱃사공, 라스베이거스의 곡예사,
늙은 피카소의 젊은 애인들처럼


그래 그래
이것은 있었다
빚보증 섰다가 파산한 삼촌의 울화병처럼
숨어다니며 구시렁대는 금치산자의 한숨처럼


대책 없이 무거워져서
떨어져 내릴 비구름의 형상으로


뭐라고 시작해야 할까
그에게 그에게 너에게


무수한 별들이 높은 데서 폭발하고 있는 동안에
오늘은 이렇게 초라했었다 전전긍긍했었다
속수무책으로 있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있었다
그러나 끝내 이 말은
가닿기도 전에 얼굴을 붉히리라


이 생각의 불, 불, 불은
흘러가던 붉은 구름 한 점처럼
저녁 빌딩 유리창에 걸려서
있었다 덧없이 *

* 최정례시집[캥거루는 캘거루이고 나는 나인데]-문학과지성사

 

* 개구리 메뚜기 말똥구리야  
너 개구리야
그 힘으로
콩 튀듯 팥 튀듯 뛰는 메뚜기야
네 사랑의 힘으로 말똥구리야
우리 말똥을 굴리며 가자
엎어지며 고꾸라지며 가자
저 들판을 지붕을 건너
개구리 메뚜기 말똥구리야
대문 걸어잠그고 두문불출한다 해도
느닷없이 따귀 맞고 쌍욕은 듣게 된다
빚 갚고 갚으며
철조망에 싹이 나고 잎이 날 때까지
꽃 피고 꽃 지고
주렁주렁 수박덩이가 매달릴 때까지
복사씨도 살구씨도 미쳐 날뛸 때까지
가자
말똥을 굴리며 굴리며

으으 개구리 메뚜기 말똥구리야
세간에 세간에 출세간에
그 너머로 우리
말똥을 소똥을 굴리며 가자

 

* 3분 동안

3분 동안 못할 일이 뭐야

기습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지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한 나라를 이룰 수도 있지

 

그런데

이봐

먼지 낀 베란다에 널린

양말들, 바지와 잠바들

접힌 채 말라가는

수치와 망각들

뭐하는 거야

 

저것 봐

날아가는 돌

겨드랑이에서

재빨리 펼쳐드는 날개를

 

저 날개 접히기 전에

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지

도장을 찍고

악수를 청하고

한 나라를 이루어야지

 

비행기가 떨어지고

강물이 갇히기 전에

식탁 위에 모래가 켜로 앉기 전에

찬장 밑에 잠든 바퀴벌레도 깨워야지

서둘러 겨드랑이에

새파란 날개를 달아야지 *

* 최정례시집[붉은 밭]-창비

 

* 껌벅이다가  

느닷없이 너 마주친다 해도 
그게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할 것 같다 
물건을 고르고 
지갑 열고 계산을 치르고 
잊은 게 없나 주머니 뒤적이다가 
그곳을 떠나듯 
  
가끔 
손댈 수 없이 
욱신거리면 진통제를 먹고 
베개에 얼굴을 박고 
잠들려고 
잠들려고 그러다가 
  
젖은 천장의 얼룩이 벽을 타고 번져와 
무릎 삐걱거리고 기침 쿨럭이다가 
왜 그럴까 왜 그럴까 
도대체 왜 그래야 할까 
헛손질만 하다가 말듯이 
  
대접만한 모란이 소리 없이 피어나 
순한 짐승의 눈처럼 꽃술 몇 번 껌벅이다가 
떨어져 누운 날 
언젠가도 꼭 이날 같았다는 생각 
한다 해도 
그게 언제인지 무엇인지 모르겠고 
  
길모퉁이 무너지며 너 
맞닥뜨린다 해도 
쏟아뜨린 것 주워 담을 수 없어 
도저히 돌이킬 수 없어 
매일이 그렇듯이 그날도 
껌벅이다가 
주머니 뒤적거리다 그냥 자리를 떠났듯이 *

* 최정례시집[레바논 감정]-문학과지성사,2006

* 최정례 시인

-1955년 경기도 화성 출생

-1990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내 귓속의 장대 나무 숲][햇빛 속에 호랑이][붉은 밭].....

-김달진문학상(1999), 이수문학상(2003)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