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유전자 트래킹 - 박후기

효림♡ 2012. 9. 21. 08:56

* 유전자 트래킹 - 박후기

걷는다

어두워지는 들판

도꼬마리가 씨앗을 건넨다

바짓가랑이에 들러붙는 것이

도꼬마리의 정착은 아닐 것이다

도꼬마리처럼

몸을 스치는 발길에

마음을 맡긴 적이 있다

식물이 누대에 걸쳐

대륙을 건너듯

내 마음도 그렇게

당신에게 건너가고 있다

그러나 불빛은 너무 멀고

냄새나는 신발 속에서

발가락들은 끊임없이

어두운 앞길을 더듬지만

언제나 막장이다

별들이 악몽을 꾸며

뒤척이는 밤

나는 당신의 집에

다다르지는 못한다 *

 

* 비박

눈내리고,
산장에서 비박하며
취사장 흐린 불빛 아래
차가운 벽에 기대어
너에게 편지를 쓴다
문밖엔 눈 덮인 빨간 우체통이
떠나가는 사람들의
사연을 품은 채
밤새 앓고 있다
구겨진 엽서 한 장
무릎 위에 올려놓고
볼펜 거머쥔 손아귀에 호호
입김 불어가며 적었던
살얼음 글씨 몇 자
결국, 보내지 못했다
너를 생각하면
얼어붙은 뺨보다 가슴이 더 시리지만,
사랑을 잃고 산길을 헤매는 사람끼리
체온을 나누어 갖는 밤도 슬프진 않다
어차피 네게로 가는 길도 지워졌으리라 *

 

* 은진   

밤에 은진 간다

지병 같은 사랑 말기,

쿨룩쿨룩

짙은 안개 내뱉으며

강 건너 은진 간다

불 켜진 훈련소 지날 때,

나무들 새벽 불침번 서다

잎 흔들어 경례 붙인다

스무 살,

야광별 천장 구석에서 빛나던

화지리 여관방

상한 별들의 지옥으로 면회 온 당신

밤새 뒤척이는 이등병

끓는 이마 언 손으로 짚어주며

병이라면 같이 앓자 하시던

그 짧았던 밤을 생각한다

어느덧

이마를 짚어주던 청춘도 늙어

더이상 같이 앓고 싶지 않을 때,

나, 강 건너 쓸쓸히

밤을 지나 은진 간다 *

 

* 사 

   글렌 굴드

침묵은

말 없는 거짓말,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살아야 하는 여자와

살고 싶은 여자가 다른 것은

연주와 감상의

차이 같은 것

건반 위의 흑백처럼

운명은 반음이

엇갈릴 뿐이고,

다시 듣고 싶은 음악은

다시 듣고 싶은

당신의 거짓말이다 *

 

* 박후기시집[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창비,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