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홀 - 나태주
시시각각 물이 말라 졸아붙는 웅덩이를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오직 웅덩이를 천국으로 알고 살아가던
송사리 몇 마리
파닥파닥 튀어 오르다가 뒤채다가
끝내는 잠잠해지는 몸짓
송사리 엷은 비늘에 어리어 파랗게
무지개를 세우던 햇빛, 그 황홀. *
* 장락무극(長樂無極)
가는 봄날이 아쉬워
짧은 봄날이 야속해
새들은 슬픈 소리로 노래하고
꽃들은 아리따운 그림자를 길게
땅바닥에 드리우지만
다만 어리석은 사람은
늙은 매화나무 가지를 그리고
그 위에 어렵사리 움튼 몇 송이
매화꽃을 그려서 벽에다 건다
피지도 않고 지지도 않는 매화꽃을
피어서 향기로운
매화꽃이라 우기면서
찌는 여름 추운 겨울을
오래 오래 견디며 산다. *
* 황홀극치
황홀, 눈부심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함
좋아서 까무러칠 것 같음
어쨌든 좋아서 죽겠음
해 뜨는 것이 황홀이고
해 지는 것이 황홀이고
새 우는 것 꽃 피는 것 황홀이고
강물이 꼬리를 흔들며 바다에
이르는 것 황홀이다
그렇지, 무엇보다
바다 울렁임, 일파만파, 그곳의 노을,
빠져 죽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황홀이다
아니다, 내 앞에
웃고 있는 네가 황홀, 황홀의 극치다.
도대체 너는 어디서 온 거냐?
어떻게 온 거냐?
왜 온 거냐?
천 년 전 약속이나 이루려는 듯. *
* 전화가 왔다
청양 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해마다 꽃철이면 같이 꽃을 보자 그랬는데
올해는 그 약속 지키지 못했노라고
칠갑산 장곡사로 가는 시오리길
휘어져 구불구불 두 줄로 벚꽃 피어 있던 길
멀리서 보거나 가까이 보거나 꿈결 같던 길
코끝까지 꽃향기로 매캐하던 길
그래도 생각이 나 찾아가 보니
올해 핀 꽃들은 어느새 지고 있더라고
그 꽃 다시 보려면 1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전화기로 들려오는 누이의 목소리에서
아득히 멀리 꽃잎이 날리고 있었다
꽃잎 가운데서도 분홍빛 물먹은 청양의
칠갑산 장곡사 꽃잎이 날리고 있었다. *
* 잔치국수 2
날마다 사는 일이 어찌
잔치날이기만을 바라랴
더러는 고개 어수룩이 숙여지고
두 무릎조차 떨리는 날
허청허청 걸어서 시장길 골목 안
국수집 찾으면 단골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며 맞아주는
젊은 주인아낙네 푸진 웃음이 먼저 잔칫날이다
국수집 좁은 방안 작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한가득 마주 앉아 후룩 후루룩
국수를 먹고 있는 손님들이 또 잔칫날이다
세상살이 때로 고달프고 그냥
모든 거 접고 떠나버리고 싶더라도
쉽게 그러지는 마시라
더러는 시장길 골목 안 잔치국수집 찾아
왁자한 사람들을 만나보기도 하실 일이다
사람들 소리의 강물 속에 시들은 귀도
잠시 적셔볼 일이다. *
* 나태주시집[황홀극치]-지식산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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