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처가 더 꽃이다 - 유안진
어린 매화나무는 꽃 피느라 한창이고
사백년 고목은 꽃 지느라 한창인데
구경꾼들 고목에 더 몰려 섰다
둥치도 가지도 꺾이고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갈라지고 뒤틀리고 터지고 또 튀어나왔다
진물은 얼마나 오래 고여 흐르다가 말라붙었는지
주먹만큼 굵다란 혹이며 패인 구멍들이 험상궂다
거무죽죽한 혹도 구멍도 모양 굵기 깊이 빛깔이 다 다르다
새 진물이 번지는지 개미들 바삐 오르내려도
의연하고 의젓하다
사군자 중 으뜸답다
꽃구경이 아니라 상처구경이다
상처 깊은 이들에게는 훈장(勳章)으로 보이는가
상처 도지는 이들에게는 부적(符籍)으로 보이는가
백년 못 된 사람이 매화 사백년의 상처를 헤아리랴마는
감탄하고 쓸어보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만졌던 손에서 향기까지도 맡아본다
진동하겠지 상처의 향기
상처야말로 더 꽃인 것을. *
* 빨래꽃
이 마을도 비었습니다
국도에서 지방도로 접어들어도 호젓하지 않았습니다
폐교된 분교를 지나도 빈 마을이 띄엄띄엄 추웠습니다
그러다가 빨래 널린 어느 집은 생가(生家)보다 반가웠습니다
빨랫줄에 줄 타던 옷가지들이 담 너머로 윙크했습니다
초겨울 다저녁 때에도 초봄처럼 따뜻했습니다
꽃보다 꽃다운 빨래꽃이었습니다
꽃보다 향기로운 사람 냄새가 풍겼습니다
어디선가 금방 개 짖는 소리도 들린 듯했습니다
온 마을이 꽃밭이었습니다
골목길에 설핏 빨래 입은 사람들은 더욱 꽃이었습니다
사람보다 기막힌 꽃이 어디 또 있습니까
지나와놓고도 목고개는 자꾸만 뒤로 돌아갔습니다. *
* 유안진시집[다보탑을 줍다]-창비
* 시계 밥 줘라
새아가, 대청마루 시계에 밥 줘라
예 아바임!
숭늉대접 올립니다 아바임
오냐, 시계 밥은 줬냐?
예 아바임
아까 전에 진지상 올렸는데, 아직 수저도 아니 드셨사와요
이런 시절 이런 댁의
새아기가 되어봤으면
아니 아니 오히려 시아비가 되었으면. *
* 시아비 버릇을 고치다
자부(子婦)들의 이름을 부르는 시부(媤父)가 있었다.
이 고약한 소문이 퍼지면서, 이 댁 막내아들의 혼인길이 콱 막혀 버렸다.
신랑감은 늙어가는데 혼처를 못 구해 애간장을 녹이는 중에,
어떤 당돌한 처녀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원했다
새 며느리를 본 시아비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며칠이
지나자, 아침상을 들고 들어온 새 며느리에게 참았던
본색을 드러냈다.
밥상 놓고 게 좀 앉거라
니는 집에서 뭐라고 불렀누?
단단히 별러 준비한 새 며느리는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시아비의 궁금증을 잔뜩 달구면서
죄송하오나 지는 이름이 하도 고약해서요
이름이 고약하다니? 그래도 시아비의 명(령)은 따르라고
배웠겠다!?
친정아버님은 벌레를 좋아하시어
큰언니는 바구미 둘째 언니는 딱정이라고 부르셨지만
저는 쥐며느리라고 부르셨어요
하하하 박장대소하려던 시아비는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요렇듯 당차고 영특했던 우리네 여조(女祖)들한테서
나 같은 얼뱅이가 생겨나다니
오호 애재라!
* 유안진 민속시집[알고(考)]-천년의시작
* 내가 나의 감옥이다
한눈팔고 사는 줄은 진즉 알았지만
두 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
언제 어디에서 한눈을 팔았는지
무엇에다 두 눈 다 팔아먹었는지
나는 못 보고 타인들만 보였지
내 안은 안 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
눈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들 피하느라
나를 내 속으로 가두곤 했지
가시껍데기로 가두고도
떫은 속껍질에 또 갇힌 밤송이
마음이 바라면 피곤체질이 거절하고
몸이 갈망하면 바늘편견이 시큰둥해져
겹겹으로 가두어져 여기까지 왔어라. *
* 유안진시집[다보탑을 줍다]-창비
* 안동(安東) - 유안진
어제의 햇볕으로 오늘이 익는
여기는 안동
과거로서 현재를 대접하는 곳
서릿발 붓끝이 제 몫을 알아
염치가 법규를 앞서던 곳
옛 진실에 너무 집착하느라
새 진실에는 낭패하기 일쑤긴 하지만
불편한 옛것들도 편하게 섬겨가며
참말로 저마다 제 몫을 하는 곳
눈비도 글 읽듯이 내려오시며
바람도 한 수(首) 읊어 지나가시고
동네 개들 덩달아 댓 귀(對句) 받듯 짖는 소리
아직도 안동이라
마지막 자존심 왜 아니겠는가. *
* 유안진시집[누이]-세계사,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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