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아침 - 문태준

효림♡ 2012. 10. 31. 16:19

* 아침 - 문태준 

새떼가 우르르 내려앉았다

키가 작은 나무였다

열매를 쪼고 똥을 누기도 했다

새떼가 몇발짝 떨어진 나무에게 옮겨가자

나무상자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무가

누군가 들고 가는 양동이의 물처럼

한번 또 한번 출렁했다

서 있던 나도 네 모서리가 한번 출렁했다

출렁출렁하는 한 양동이의 물

아직은 이 좋은 징조를 갖고 있다 *

 

* 가을 창가

늦은 저녁밥을 먹고 어제처럼 바닥에 등짝을 대고 누워 몸을 이리저리 뒤집었다//

산굽이처럼 몸을 휘게 해 둥글게 말았다 똥을 누고 와 하던 대로 다시 누웠다//

박처럼 매끈하고 따분했다 그러다 무심결에 창가에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천천히 목을 빼 들어올렸다 풀벌레 소리가 왔다//

가을의 설계자들이 왔다//

저기서 이쪽으로, 내 귀뿌리에 누군가 풀벌레 소리를 확, 쏟아부었다//

쏟아붓는 물에 나는 흥건하게 갇혀 아, 틈이 없다//

밤이 깊어지자 나를 점점 세게 끌어당기더니 물긋물긋한 풀밭 깊숙한 데로 끌고 갔다 *

 

* 눈 내리는 밤

말간 눈을 한

애인이여,

동공에 살던 은빛 비늘이여

오늘은 눈이 내린다

눈은 밤새 내린다

목에 하얀 수건을 둘러놓고 얼굴을 씻겨주던

가난한 애인이여,

외로운 천체에

성스러운 고요가 내린다

나는 눈을 감는다

손길이 나의 얼굴을 다 씻겨주는 시간을 *

 

* 바위 

풀리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다

새의 붉은 부리가 쪼다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입담이 좋았던 외할머니도 이 앞에선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나뭇짐을 내다 팔아 밥을 벌던 아버지도 이것을 지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덧 나도 사랑을 사귀고 식탁을 새로 들이고 아이를 얻고 술에는 흥이 일고

이 미궁의 내부로부터 태어난 지 마흔 해가 훌쩍 넘었다

내가 초로를 바라볼 때는 물론

내가 눈감을 그날에도 이것은 뒷산이 마을에게 그러하듯이 나를 굽어볼 것이다

나는 끝내 풀지 못한 생각을 들고 다시 캄캄한 내부로 들어갈 것이다

입술도 귀도 사라지고 이처럼 묵중하게만 묵중하게만 앉아 있을 것이다

집 바깥으로 내쫓김을 당해 한밤 외길에 홀로 눈물 울게 된 아이와도 같이

그리고 다시 이 세계에 새벽이슬처럼 생겨난다면 이것을 또 밀고 당기며 한 마리 새가 되고,

외할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마흔 몇 해가 되고.....

시간은 강물이 멀리 넘어가듯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

 

* 강을 따라갔다 돌아왔다 
혼(魂)이 오늘은 유빙(流氷)처럼 떠가네
살차게 뒤척이는 기다란 강을 따라갔다 돌아왔다
이곳에서의 일생(一生)은 강을 따라갔다 돌아오는 일
꿈속 마당에 큰 꽃나무가 붉더니 꽃나무는 사라지고 꿈은 벗어놓은 흐물흐물한 식은 허물이 되었다
초생(草生)을 보여주더니 마른 풀과 살얼음의 주저앉은 둥근 자리를 보여주었다
가볍고 상쾌한 유모차가 앞서 가더니 절룩이고 초라한 거지가 뒤따라왔다
새의 햇곡식 같은 새의 아침 노래가 가슴속에 있더니 텅 빈 곡식 창고 같은 둥지를 내 머리 위에 이게 되었다
여동생을 잃고 차례로 아이를 잃고
그 구체적인 나의 세계의, 슬프고 외롭고 또 애처로운 맨몸에 상복(喪服)을 입혀주었다
누가 있을까, 강을 따라갔다 돌아서지 않은 이
강을 따라갔다 돌아오지 않은 이
누가 있을까, 눈시울이 벌겋게 익도록 울고만 있는 여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이
누가 있을까, 삶의 흐름이 구부러지고 갈라지는 것을 보지 않은 이
강을 따라갔다 돌아왔다
강을 따라갔다 강과 헤어지는 나를 바라보았다
돌담을 둘렀으나 유량과 흐름을 지닌 집으로 돌아왔다
돌담을 둘렀으나 유량과 흐름을 지닌 무덤으로 돌아왔다 *

 

* 오랫동안 깊이 생각함
이제는 아주 작은 바람만을 남겨둘 것
흐르는 물에 징검돌을 놓고 건너올 사람을 기다릴 것
여름 자두를 따서 돌아오다 늦게 돌아오는 새를 기다릴 것
꽉 끼고 있던 깍지를 풀 것
너의 가는 팔목에 꽃팔찌의 시간을 채워줄 것
구름수레에 실려 가듯 계절을 갈 것
저 풀밭의 여치에게도 눈물을 보태는 일이 없을 것
누구를 앞서겠다는 생각을 반절 접어둘 것 *

 

* 먼 곳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움쿰, 한움쿰,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

 

* 문태준시집[먼 곳]-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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