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 정진규

효림♡ 2012. 10. 4. 11:11

*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 정진규

 

   어쩌랴, 하늘 가득 머리 풀어 울고 우는 빗줄기, 뜨락에 와 가득히 당도하는 저녁 나절의 저 음험한 비애의 어깨들 오, 어쩌랴,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혼자일 따름이로다 뜨락엔 작은 나무의자 하나, 깊이 젖고 있을 따름이로다 전재산이로다

   어쩌랴, 그대도 들으시는가 귀 기울이면 내 유년의 캄캄한 늪에서 한 마리의 이무기는 살아남아 울도다 오, 어쩌랴, 때가 아니로다, 때가 아니로다, 때가 아니로다, 온 국토의 벌판을 기일게 기일게 혼자서 건너가는 비에 젖은 소리의 뒷등이 보일 따름이로다

   어쩌랴, 나는 없어라 그리운 물, 설설설 끓이고 싶은 한 가마솥의 뜨거운 물, 우리네 아궁이에 지피어지던 어머니의 불, 그 잘 마른 삭정이들, 불의 살점들 하나도 없이 오, 어쩌랴, 또다시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오직 혼자일 따름이로다 전재산이로다, 비인 집이로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하늘 가득 머리 풀어 빗줄기만 울고 울도다 *

 

 

*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 정진규

남들도 다 그런다하기 새 집 한 채를 고향에 마련할 요량으로 그림을 그려가다가 늙은 아내도 동참시켜 원하는걸 그려보라 했더니 빈 하늘에 빨랫줄 하나와 원추리랑 채송화가 피는 장독대가 있는 집이면 되었다고 했다 남들이 탐하지 않도록 눈에 뜨이지 않게만 하라고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실용(實用)도 끝이 있구나! 나는 놀랐다 내 텅빈 실용 때문에 텅빈을 채우려고 육십 평생을 소진했구나 아내의 실용이 바뀌었구나 눈물이 한참 났다 이제야 사람 노릇 좀 한번 하려고 실용 한번 하려고 나는 실용의 그림들을 잔뜩 그려 넣었는데 없는 실용의 실용을 아내가 터득했구나 눈에 뜨이지 않게까지 알아버리다니 다 지웠구나 나는 아직 그냥 그탕인데 마침내 일자무식(一字無識)으로 빈 하늘에 걸린 아내의 빨랫줄이여! 구름도 탁탁 물기 털어 제 몸 내다 말리는구나 염치없음이여, 조금 짐작하기 시작한 나의 일자무식도 거기 잠시끼어들었다 염치없음이여, 또다시 끼어드는 나의 일생(一生)이여 원추리 핀다 채송화 핀다 *
 

 

* 여물어 벙그는 알밤처럼 - 정진규

 

  고향엘 갔었어 알밤들은 여물어 벙글고 있었어 날카로운 가시들의 무수한 근위병들을 거느리고 노려보고 있었어 누가 건드리면 터져, 전량으로 그렇게 지키고 있었어 용기를내어 툭, 건드려보았어 진짜, 진짜, 와르르 쏟아졌어. 좋아라, 좋아라, 바구니에 주워담다가 가득가득 주워 담다가 아무래도 나는 처참해질 수밖에 없었어  알밤들 하나하나가 나를 가두어버렸어 나는 가짜야, 가짜야 돌아와 을지로쯤의 저녁 거리를 걸어가면서 가볍게 어깨를 치는 낙엽 한 장의 무게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있었어 다 알아버렸어 들켜버렸어 누가 지금 가장 시다운 시를 쓰고 있는지 누가 가짜인지 누가 진짜인지 다 알아버렸어 이 가을에 나는 분명해졌어 서정시건 애국시건 여물어 벙그는 알밤처럼 할 일이야 그렇게 지키는 일만이 중요해 이 가을에 나는 분명해졌어 *

* 신경림엮음[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글로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