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꽃사과 꽃 피었다 - 황인숙

효림♡ 2013. 8. 29. 10:10

* 꽃사과 꽃이 피었다 - 황인숙

꽃사과 꽃 피었다.

계단을 오르면서 눈을 치켜들자

떨어지던 꽃사과 꽃

도로 튀어오른다.

바람도 미미한데

불같이 일어난다.

희디흰 불꽃이다.

꽃사과 꽃, 꽃사과 꽃.

눈으로 코로 달려든다.

나는 팔을 뻗었다.

나는 불이 붙었다.

공기가 갈라졌다.

하! 하! 하!

식물원 지붕 위에서

비둘기가 내려다본다. 가느스름 눈을 뜨고.

여덟시 십분 전의 공중목욕탕 욕조물처럼

그대로 식기 전에 누군가의 몸 속에 침투하길 열망하는

누우런 손가락엔

열 개의 창백한 손톱 외에

아무것도 피어 있지 않다.

내 청춘, 늘 움츠려

아무것도 피우지 못했다, 아무것도.

 

꽃사과 꽃 피었다. *

 

* 추운 봄날 
요번 추위만 끝나면
이 찌무룩한 털스웨터를 벗어던져야지
쾨쾨한 담요도 내다 빨고
털이불도 걷어치워야지.
펄렁펄렁 소리를 내며
머리를 멍하게 하고 눈을 짓무르게 하는 난로야
너도 끝장이다! 창고 속에 던져넣어야지.
(내일 당장 빙하기가 온다 해도)

요번 추위만 끝나면
창문을 떼어놓고 살 테다.
햇빛과 함께 말벌이
윙윙거리며 날아들 테지
형광등 위의 먼지를 킁킁거리며
집터를 감정할 테지.

나는 발돋움을 해서
신문지를 말아쥐고 휘저을 것이다.
방으로 날아드는 벌은
아는 이의 영혼이라지만.
(정말일까?)

아, 이 어이없는,지긋지긋한
머리를 세게하는, 숨이 막히는
가슴이 쩍쩍 갈라지게 하는
이 추위만 끝나면
퍼머 골마다 지끈거리는
뒤엉킨 머리칼을 쳐내야지.
나는 무거운 구두를 벗고
꽃나무 아래를 온종일 걸을 테다.
먹다 남긴 사과의 시든 향기를 맡으러
방안에 봄바람이 들거나 말거나. 

 

벌써 사월인데! * 

 

*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기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풀 속을 누벼누벼

너른 벌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서 후닥닥 달아나겠지.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 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 

 

* 황인숙시선집[꽃사과 꽃이 피었다]-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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